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3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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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클레멘타인 3

명안진사엔 대강 세 부류의 사람들이 머물렀다. 첫 번째 부류는 백주사를 비롯한 이사장의 핵심심복들이고, 두 번째 부류는 식사준비를 비롯한 온갖 궂은일을 하며 아예 명안진사에 들어와 살고 있는 ‘패밀리’ 그룹이고, 세 번째 그룹은 단식을 위해 한시적으로 머물며 단식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손님’들이었다.

실세권력을 쥔 사람은 백주사였다.
그는 이사장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이사장의 손발 노릇을 완벽하게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사장은 그에게 일종의 ‘지존(至尊)’이었다. 눈빛만 보고도 ‘지존’의 뜻을 알아차리는 사람이었고, 지존의 뜻을 반드시 실현시켰다. 말수가 적었을 뿐 아니라 표 나게 앞으로 나서는 법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이사장의 분신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단식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출내기 ‘손님’들뿐이었다. 그의 하수인으로는 ‘김실장’과 ‘노과장’이 가장 측근에 있었다. 함께 샹그리라에 들어와 있는 것으로 볼 때 백주사 다음의 서열은 아마 김실장일 것이었다.

백주사가 이사장의 그림자라면 김실장은 백주사의 그림자였다.
그는 백주사의 명령을 받고 주로 외부 일을 많이 하는 것 같았다. 명안진사 내부의 일을 주로 맡아 하는 것은 ‘노과장’ 쪽이었다. 차를 몰고 다니면서 명안진사의 울타리 안의 모든 일을 실질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백과장 또한 영향력이 만만하지 않았다. 토목기사 1급 자격증을 비롯한 많은 기능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것도 백과장이었다. 백과장은 기계에 대해선 모르는 것이 없었고, 그래서 포클레인 기사를 비롯한 두세 명의 인부를 그가 거느리고 있었다. 인부들을 가리켜 사람들은 너나없이 ‘삼촌’이라고 불렀다.

어쨌든 김실장과 노과장은 명안진사의 양 날개 같은 존재였다.
단식원 건물 외벽과 축대 사이에서 내 뒷덜미를 잡아챘다가 두개골 파열로 즉사한 김실장의 파트너, ‘땅딸한 남자’의 시신을 세지봉으로 옮겨 추락사한 것처럼 꾸민 일도 김실장과 노과장의 솜씨일 가능성이 많았다. 경찰에게 명안진사를 뻔질나게 드나드는 명분을 주기 싫어 시체를 세지봉으로 감쪽같이 운반했을 터였다.

안살림을 맡아 하는 이는 ‘미소보살님’이었다.
‘미소보살님’은 육덕이 좋은 사십대 중반의 여자였는데 이름 그대로 늘 입술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가슴이 산봉우리 같은 여자였다. 식사준비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빨래며 청소며, 안살림의 모든 것이 미소보살의 소관이었다. 그녀를 돕는 여자들이 있었지만 좌장이라 해서 그녀가 일을 두고 물러앉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여자들보다 궂은일도 먼저 했고 또 많이 했다. 그녀 이외의 여자들을 명안진사에선 모두 ‘이모’라고 불렀다. 그녀가 말하자면 ‘왕언니’였다.

미소보살은 목소리도 걸걸했고 힘도 좋았다.
두 여자가 들지 못한 고추장항아리를 혼자 불끈 들어 옮긴 일도 있었다. 그녀에겐 함께 사는 어린 딸이 있었는데 내가 몰래 처음으로 단식원 내부를 들여다보던 날 밤에, 눈부신 흰옷을 입혀 ‘가짜관음보살’ 역할을 했던 바로 그 소녀였다. 소녀는 선녀처럼 이뻤고, 환했다. 피부가 백옥이었다. 이사장이 소녀의 흰 드레스를 찢어발기며 ‘이것은 관음보살이 아니’고 단지 ‘가짜요, 얼룩’이라고 소리친 후에도 사람들은 소녀를 만나면 절로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았다. 관음보살의 현현이라고 실제 믿는 사람도 있었다. 중학교 이학년까지 다니다가 지금은 학교에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소녀의 이름은 ‘현주’였으나 소녀를 가리켜 사람들은 모두 ‘애기보살’이라고 불렀다.

그 외에 ‘패밀리’로 불리는 사람들은 이십여 명 남짓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중증의 환자들이었다. 거동을 거의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곳에 들어온 뒤 기적 같은 은혜를 받아 많이 좋아졌다는 사람도 있었다. 회생불능의 선고를 받은 말기암 환자거나 기타 내인성(內因性) 만성질환자들이었다. 명상과 자연섭생을 통해 의식을 바꿈으로써 내적 번뇌의 단초가 되는 심리적 괴리를 극복, 참된 정각(正覺)에 도달하면 병이 저절로 치유되는 놀라운 현상과 만난다는 이사장의 설법에 감동해 명안진사에 머물기로 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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