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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덕의 13억 경제학] 중국경제 콘서트(38) ‘중국 붐과 통닭 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또 다시 중국 붐입니다. 예전의 열기와는 다른 게 관찰 됩니다. '관(官)이 나서고 있다'는 것이지요. 외교안보연구원에 차이나센터가 생기고, 외교부 예산이 10배나 늘어나고, 지식경제부에서는 '중국과'가 새로 생겨났습니다. KOTRA는 중국에 10개 이상의 무역관을 더 만든다는군요.

온통 중국입니다.

업계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했던 일입니다. 앞서가는 기업들은 오래 전 비즈니스의 목표점을 중국으로 클릭조정했습니다. 정부는 언제나 뒷북을 치지요. 그럼에도 이번 중국 붐은 반길 만합니다. 정부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연구를 연구할 수 있는, 조감 실력이 있는 중국 연구 기관의 탄생을 기대해봅니다.

퍼뜩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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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특파원 생황을 마치고 귀국한 게 2006년 말이었습니다. 거리에서 이상하다 싶은 것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동네 통닭집이 유독 많았다는 겁니다. 왜 그리 통닭집이 많을까. 주위 기자에게 물어보니 돌아오는 대답이 이랬습니다.

"IMF때문이야. 아시아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많은 직장인들이 직장에서 쫒겨났고, 그들이 가장 손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통닭집이었어. 통닭집도 그나마 너무 많이 생기고, 프랜차이즈점이 득세하는 바람에 어렵게 됐다지 아마..."

통닭집에 '아시아 외환위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던 겁니다(사진은 본문 내용과 관계 없습니다).

아시아금융위기-.

중국이 1994년 환율을 개혁합니다. 국가고시환율과 시장환율로 나뉘어있던 환율시스템을 시장환율로 통합한 겁니다. 당시 국가고시환율 달러당 5.7위안, 시장환율은 8.7위안이었습니다. 국가고시환율이 없어지고 모든 환율이 달러당 8.7위안으로 결정된 겁니다.

외국과의 교역에서는 국가고시환율이 적용됐습니다. 달러당 5.7위안 환율이었지요. 그런데 94년 1월1일부터 이게 8.7위안으로 바뀌었습니다. 환율이 크게 올랐지요. 평가절하된 겁니다. 위안화 가치가 떨어지면 중국의 수출이 늘어나게 됩니다. 그 때부터 중국의 저가 상품이 세계 백화점을 파고들기 시작합니다.

1994년 중국의 환율개혁은 전혀 예상치 못한 다른 곳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저가상품 수출시장을 놓고 경쟁하던 동남아였지요. 중국 상품이 세계 시장을 휩쓰니까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의 수출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남아시아 국가의 무역흑자폭이 줄어들더니 결국 대규모 적자로 이어지게 됐습니다. 달러가 고갈되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아시아 외환위기는 잉태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어설픈 자유주의 금융시장 메커니즘이 결부되면서 태국을 시작으로 위기에 휩쓸리게 된 것이지요.

한국 역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같은 논리로 한국 역시 외환위기의 고통으로 빨려가고 있었지요. 게다가 한국은 96년 말 OECD에 가입하면서 선진국 샴페인에 취해 있었지요. 무역적자가 쌓여도 걱정이 없었습니다. 자본시장 개방으로 해외에서 값 싼(저금리)돈이 쇄도했으니까요. 그게 펑크난 게 1997년 외환위기입니다.

"그 때 중국은 우리나라 금융정책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어. 94년 환율개혁에 신경 쓰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 당시만해도 중국은 '후진국'이었거던.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 어리석었지. 13억 중국 노동자의 강력한 생산력을 무시했던거야."

당시 금융 당국에서 중책을 맡고 있다가 지금은 한 국책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금융통 관계자의 얘기입니다. 그 때 중국에서의 변화를 감지하고 우리나라 수출 여건을 재점검 했었어야 했다는 겁니다. 외환위기를 어찌 중국 요인하나로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중국 환율시스템 개혁이 한 원인(源因)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은 변화가 우리나라 수 천 만 명의 삶을 황폐화시키는 일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것은 현실로 나타났고, 수 많은 직장인들을 통닭집으로 몰아넣었던 겁니다.

사례를 보면 무작 많습니다.

얻그제 부산에 가 조선기자재업체 사장님들과 교류를 갖게 됐습니다. 걱정이 많았습니다. 연말 우리나라의 조선 수주량이 많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기자재(부품)업계는 썰렁하답니다. 조선기자재 업계의 한 숨에서도 '중국'의 악령을 발견하게 됩니다.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게 2001년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중국으로 드나드는 컨테이너가 급증하게 됩니다. 중국의 교역량이 한 해 30~40%씩 늘어나기도 하지요. 무역업체는 배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였습니다. 해상 운송 수요가 급증한 것이지요.

세계 선박업주들은 신규 배 주문을 냅니다. 조선업계 초 호황을 누리게 되지요. 우리나가 최대 수혜자였습니다.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 등은 즐거운 비명이었습니다. 거기가 끝은 아니었습니다. 중소 블록업체(배의 일 부분을 많들어 완성배 제작업체에게 납품하는 회사)들이 너도나도 완성배를 만들겠다고 나섭니다. 주문이 폭주했으니까요.

우리나라 남해안 일대에 조선업체들이 우후죽순으로 태어납니다. 지방자치단체가 너도나도 나섭니다. 일각에서 '과열' 경고음이 나왔습니다만 세수에 눈이 먼 이들 지자체는 '택도 없는 소리'라며 일축했습니다.

똑같은 시기 중국도 대규모 조선업 확충에 나섰습니다. 공급과잉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벌어지고 있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완전히 맛이 가게 된겁니다. 그 결과가 어떤 지는 부산에 내려가보시면 금방 압니다.

중국 경제의 작은 변화가 우리나라 국민들의 생계에 타격을 줍니다. 중국 경제의 작은 움직임이 우리나라 기업의 존망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전형적인 나비효과입니다. 중국경제와 한국인의 삶은 시간이 갈 수록 더 밀착될 겁니다. 그만큼 중국에 대한 연구가 시급합니다. 중국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선지적 지혜가 필요합니다.

새로 생기는 정부내 여러 중국 관련 단위(單位)가 이같은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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