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장 춥던 날 얼음물 구덩이 포복 … 그들은 떨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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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를 기록한 15일 체감온도 영하 16도의 강추위 속에 해병대 1129기 훈련병들이 포항 해병대 신병교육단 교장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 얼음이 언 웅덩이를 훈련병이 누운 자세로 지나고 있다. [포항=김태성 기자]


“끝까지 밀어! 지금 바들바들 떨고 있나!” “아이이아아아아(아닙니다)~!!!”

홑겹 군복이 흙탕물에 젖었다. 칼바람에 검붉게 얼어터진 훈련병의 얼굴 위로 교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꽁꽁 언 입에서는 대답 대신 악에 받친 고함 소리만 나왔다. 체감온도 영하 16도. 올 들어 가장 추웠던 지난 15일, 포항 해병대교육훈련단에서는 1129기 신병 430명이 누운 포복 자세로 얼음물에 몸을 담갔다. 장갑을 벗자마자 손가락이 얼어붙어 펜조차 쥘 수 없는 매서운 날씨였다.

20대 초반의 아들들은 군복 한 장으로 몸을 가리고 추위와 싸웠다. 훈련장에서 만난 선임교관 김완택(44) 상사는 “안에 팬티 한 장도 안 입혔다”고 전했다. 그는 “어제 저체온증으로 3~4명이 쓰러졌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오늘은 (기온이) 더 떨어졌다”며 “해병대 훈련은 어떤 악조건에서도 강행하는 게 원칙”이라고 했다. 훈련장 곳곳엔 폭파시킨 얼음 조각이 나뒹굴었다.

점심식사 전 함성을 외치며 오전 훈련을 마무리하는 모습. [포항=김태성 기자]

 이날은 해병대 신병교육의 꽃이라고 불리는 ‘극기주’ 셋째 날이었다. 총 6주 교육과정 중 5주차에 해당하는 ‘극기주’ 동안 신병들은 침투 및 각개전투 훈련, 시가지전투 훈련, 화생방 훈련, 고지정복 훈련을 받는다. 훈련병들은 하루 4시간 이내의 수면시간과 평소 절반 정도의 식사량으로 한 주를 버텨야 한다. 극기주를 이겨내면 해병의 상징인 빨간 명찰이 수여된다. 포복을 마치고 몸을 일으키던 1132번 훈련병은 “지금 하나도 춥지 않다”며 “빨리 내일이 와서 빨간 명찰을 달고 싶습니다”라고 소리쳤다. 상처에 피가 맺힌 그의 뒷목덜미 아래로 누런 흙탕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해병대교육훈련단은 1977년 포항에 문을 열었다. 이후 33년간 계급을 막론하고 모든 신병을 교육해 온 ‘해병대 인큐베이터’다. 이곳에서는 15일마다 3개의 신병교육대가 돌아가며 새 기수를 맞는다. 현재 제1신병교육대에서는 1129기 훈련병 430명이 8개 소대로 나뉘어 교육을 받고 있다.

 이들이 입소식을 치른 지 열흘 만에 연평도가 공격당했다. 1소대 소대장 김태언(34) 상사는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내 새끼들이 실무부대에 가서 살아남도록 만들기 위해 더 큰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1소대 55명을 포함해 지금 그가 맡은 1129기 신병들은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부터 연평도와 백령도, 대청도 등지의 배치받은 자대로 투입될 예정이다.

 김 소대장은 제1교육대 훈련교관 중 최고참이다. 그는 이번 교육을 끝으로 5년간의 훈련교관 생활을 마친다. 그동안 40개 기수, 1만5000여 명의 젊은이가 그의 손을 거쳐 ‘진짜 사나이’가 됐다. 그는 혹독한 훈련으로 악명이 높다. 1129기 훈련병들은 김 소대장을 ‘하체 브레이커’라고 불렀다. 체력훈련 때 하체운동을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시켜 얻은 별명이다. 1소대 훈련병들은 고지정복 훈련이 끝나자 기념촬영 자리에서 “사랑한다”며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

심새롬 기자

16일 오후 훈련병들이 고대하던 빨간명찰 수여식이 열렸다. 김 소대장은 훈련병 한 명 한 명의 왼쪽 가슴에 빨간 명찰을 달아줬다. 1소대 나진영(21) 훈련병은 “이걸 위해 해병대에 세 번 떨어져가며 입대했다”며 눈물을 쏟았다. “왜 훌쩍거리고 있느냐”고 소리치는 김 소대장의 눈가도 어느새 촉촉히 젖어 있었다.

수여식이 끝나자 해병대 교육훈련단 체육관에는 군가 ‘나가자 해병대’가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북한의 연평도 공격으로 전사한 두 장병의 영결식에서 불렀던 그 노래였다. “아무나 될 수 있었다면 나는 해병대를 선택하지 않았다”며 갓 해병이 된 기쁨에 팔각모를 던지던 젊은이들의 순수한 눈빛. 그 눈빛은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며 군가를 부르던 백발 노병들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대한민국 해병대를 만드는 힘은 그들의 탄탄한 몸이 아닌 순수한 눈빛이었다.

포항=심새롬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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