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년과 악의 화신 공존하는 얼굴 조승우 스펙터클한 연기 명불허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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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호 09면

2004년 초연 이래 대한민국 뮤지컬 역사를 새로 써 온 ‘지킬 앤 하이드’가 2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군복을 벗은 ‘조지킬’ 조승우의 4년 만의 복귀무대를 2일 관람했다. 이 작품은 19세기 영국 작가 로버트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를 원작으로,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의 이중성을 다뤘다. 미국에서는 1990년에 초연됐고, 97년 브로드웨이에 입성한 이래 탄탄한 구성과 아름다운 음악으로 예술성과 대중성을 인정받으며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2001년까지 4년여 동안 1587회의 롱런을 기록하면서도 결국 제작비 700만 달러의 75%를 회수하는 수준에 그치며 대박 흥행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2011년 3월 31일까지 서울 잠실 샤롯데씨어터

그런데 국내에선 상황이 좀 다르다. 2004년 초연 당시 ‘조승우 신드롬’을 일으키며 객석 점유율 98%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겼고 2006, 2008년 공연까지 총 35만 관객을 동원하고 일본 원정까지 성공한 유례 없는 작품으로 꼽힌다. 2010년 공연 역시 10월 26일 예매 개시 15분 만에 서버를 다운시키며 사상 초유의 예매 전쟁을 일으켰다. 현재 1월 공연까지 오픈된 상태에서 70% 이상의 티켓이 이미 판매됐다. 조승우 출연분은 전석 매진된 상황이다. 요컨대 ‘지킬 앤 하이드’는 대한민국에서 유독 폭발적인 사랑을 받는 뮤지컬인 셈이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가 한국인을 사로잡은 동력은 대체 뭘까?

첫째, 폭발하는 음악이 있다. ‘지킬 앤 하이드’의 음악은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 혼이 공연 10년 전인 1980년부터 기획한 것들이다. 덕분에 완성도 높은 서정적이고도 웅장한 노래들로 가득한데, 뮤지컬사상 가장 많은 히트곡을 보유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지금 이순간(This is the moment)’은 우리나라 남자 뮤지컬 배우 중 한 번 이상 안 불러본 배우가 없다는, ‘한국인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뮤지컬 노래’로 손꼽힌다. ‘한때는 꿈에(Once upon a dream)’ ‘당신이라면(Someone like you)’ 등도 올림픽, 미스 유니버스 등 각종 행사에 단골로 등장하는 친숙한 노래들이다. 막힌 속을 뻥 뚫어줄 만큼 폭발적인 가창력을 동반하는 소름 끼치는 노래들의 행렬은 관객의 귀를 강렬하게 자극한다. 두 여주인공이 듀엣으로 부르는 ‘그의 눈에서(In his eyes)’는 한국인이 선호하는 라이벌 대결구도까지 선보이며 듣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둘째, 안타까운 로맨스가 있다. 인간의 이중성과 위선을 꼬집은 괴기스러운 원작소설에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얹어 감성까지 자극하는데, 한국인이 좋아하는 막장코드는 아니더라도 삼각관계, 아니 사각관계다. 이지적인 청년 지킬과 악의 화신 하이드, 헌신적인 여인 엠마와 정열의 화신 루시가 얽힌 팽팽한 러브스토리는 엠마를 사랑하면서도 루시에게 끌리는 인간의 이중적 본성에 관한 자기 고백이다. 심지어 극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모든 여성들의 로망인 결혼식 장면. 루시를 죽이고 잠잠해졌던 하이드의 재등장으로 파국으로 치닫는 와중에도 엠마의 흔들림 없는 사랑에 제정신을 찾고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나약한 인간심리에 작별을 고하는 지킬의 모습은 비극적 사랑에 안타까움을 보탠다.

셋째, 화끈한 하이라이트가 있다. 명장면으로 인구에 회자돼온 ‘지금 이순간’과 ‘대결(Confrontation)’이 각각 전·후반의 클라이맥스를 책임지며 확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지금 이순간’은 인생의 전환점을 이룰 결단의 순간 확고한 의지를 피력하는 호소력 짙은 열창으로, ‘바로 그 순간’ 관객들은 이 준수하고도 열정적인 청년에 홀딱 반하게 된다. ‘대결’의 이른바 ‘아수라백작 쇼’는 지킬과 하이드의 이중성을 극대화하는 장치. 별다른 분장 없이 조명의 변화와 표정 연기, 테너와 바리톤의 음색 변주만으로 완벽히 표현되는 이성과 마성의 분열은 다른 어떤 작품에서도 보기 힘든 소름 끼치는 명장면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배경일 뿐. ‘지킬앤 하이드’가 한국인을 열광시킨 진짜 원동력은 조승우가 이끌어내는 매혹적인 캐릭터의 힘이다. 선과 악, 두 인격을 넘나드는 매력적인 캐릭터 지킬은 그 이중성만으로 충분히 드라마틱한데, 캐릭터의 극적인 요소이자 모든 이를 사로잡는 ‘변신’ 코드를 한 인간이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이 작품의 관전포인트가 놓여있다. 대한민국의 뮤지컬 기록을 갈아치워온 캐릭터 지킬의 힘은 곧 변신의 천재 조승우의 힘이다.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청초한 소년의 얼굴에 감미로운 목소리를 가진 이 미청년이 선하고 지적인 의사에서 악으로 폭발할 듯한 괴물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때, 관객은 신선한 충격과 함께 그의 존재 자체에 온전히 빠져들게 된다.

감정의 과잉 없이 절제된 내면 연기와 살아 있는 디테일은 과장스러운 몸부림 없이도 브로드웨이의 거구 지킬들 못지않은 파괴력을 지닌다. 통상 뮤지컬 배우들의 패턴인 과장된 연기는 극의 감정이입을 방해한다. 쇼는 쇼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캐릭터에 자연스럽게 녹아내린 조승우의 신들린 연기는 극 전체를 살아 숨쉬게 하며 ‘피식’ 하는 웃음만으로도 객석을 완전히 지배한다. 이 말론 브란도급의 메소드 연기가 파워풀한 음악과 만날 때 스펙터클이 폭발하며 특별한 감동이 생산되는 것이다.

군복을 벗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의 연기는 조금도 녹슬지 않은 관록을 보여줬다. 조승우는 ‘지킬 앤 하이드’가 만들어낸, 혹은 ‘지킬 앤 하이드’를 만들어낸 대한민국의 진정한 뮤지컬스타였다. 그가 광기에 가까운 연기력을 지닌 배우임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재능이 넘치는 스타가 무대 위에서 모든 에너지를 아낌없이 쏟아 붓는 모습을 ‘육신으로’ 확인하는 일은 그 자체가 또 다른 감동이다. 어느 인터뷰에서의 그의 말처럼 뮤지컬은, 무대는 감동을 주어야 한다. 조승우가 만드는 무대는 감동의 극대화, 그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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