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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징집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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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week& 팀장

언젠가 한 지인이 성적 나쁜 아들을 나무랐더니 이 아들, 이렇게 대답하더란다. “저는 여자가 아니잖아요.” 그는 “요즘 사내 녀석들은, 공부는 여자가 당연히 잘하는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요즘 각급 학교에서 여학생이 1등하고 회장하는 건 흔한 일이다. 각종 국가고시의 여자 합격자 수가 전체의 절반에 육박하고, 최근 우리 신문사 신입기자 수만 해도 여성이 절반 이상이다. 기억하건대 이 같은 여성의 도약은 불과 10여 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속도로 본다면 ‘세상의 절반은 여자’라는 게 진정 어떤 세상인지 보여주는 날은 조만간 올 것이다. 여성이 국무회의의 절반, 국회의원의 절반을 차지하고 여자 대통령이 당연시되는 그런 날이 말이다.

 한데 최근 이런 미래와 슬쩍 어긋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됐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이후다. 신문사엔 데스크들이 모여 그날의 신문제작 방향을 정하는 편집회의라는 게 있다. 우리 사회의 주요 의사결정 기구들은 아직 남성중심인 만큼 편집회의도 마찬가지다. 우리 편집회의도 여성 멤버라곤 이 사람밖에 없는 ‘남성천하’다. 나는 ‘여기자를 사회부에 둘 수 있느냐’가 논란거리였던 ‘미개한’ 시절에 기자를 시작해 ‘홍일점(紅一點)’ 생활엔 이골이 난 터라 남자 1개 여단 규모를 풀어놓는다 해도 ‘말발’에서 밀리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연평도 사태 이후 회의에서 내 입은 닫혔다.

 관념적인 안보 상황이 아니라 진짜 포탄이 오가는 실제상황이 되자 말문이 막힌 것이다. 의견과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자신과 확신이 없어서다. 군대 문전에도 못 가본 문외한이라 군사문제엔 무지하다 보니 예비역 병사들과 말을 섞을 처지가 못 되기도 하려니와 지레 자격지심도 발동해서다. 이 토론장에서 혼자만 시쳇말로 ‘멍 때리고’ 앉아 있는 꼴이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편집회의와 국무회의의 절반이 여성으로 채워질, 조만간 맞게 될 그날, 만일 연평도 사태가 터진다면? 그야말로 절반이 ‘멍 때리는’ 아찔한 광경이 연출되진 않을까.

 우리는 평화로운 국경을 가지지 못한 분단국가에 산다. 그래서 병역은 국민의 의무이고, 최근엔 복무기간 연장을 놓고 말이 많다. 그런데 이는 남자만의 문제다. 이렇게 여자들이 똑똑한 나라에서, 국가 최대 현안인 안보의 의무에서 절반의 국민인 여자들은 쏙 빠져 있다. 차라리 생니를 뽑는 게 군대 가는 것보다 낫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병역이 힘겨운 의무라는 건 안다. 하지만 모든 권리와 마찬가지로 의무도 한 성(性)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혜택이 아니라 ‘소외’다. 그럼 여성도 징집하라는 말이냐고? 맞다. 바로 그 말이다.

 여성 후배들이 이를 군대 갈 나이를 넘긴 ‘언니의 망언’이라며 야속해 하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날 여성의 지위는 거저 주어진 게 아니다. 여성 소외를 용납하지 않고 관행에 맞섰던 선배들의 투쟁과 희생의 결과다. 병역이 국민의 의무인, 휴전 중인 이 나라에서 진정한 남녀평등의 사회를 구현하려면 이제 여성 스스로가 의무의 이행 의지를 피력할 때가 됐다.

양선희 week&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