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분양 흔해 집 사도 청약통장은 안 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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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4면

‘견본주택은 북적거리지만 청약 성적은 기대 이하’. 요즘 서울·수도권 분양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급매물이 팔리고 주택 거래가 증가하는 등 서울·수도권 주택시장이 살아날 기미를 보이자 문을 여는 견본주택마다 방문객이 줄을 있고 있다. 주말에는 수천여 명이 다녀가기도 하고, 실제로 계약에 관심을 보이는 수요자도 적지 않다. 하지만 막상 청약신청을 받아 보면 실적은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지난 1일 1순위 접수를 한 경기도 용인시 성복아이파크는 분양가 상한제가 적용돼 앞서 분양된 단지보다 분양가가 3.3㎡당 200만원 정도 쌌다. 게다가 중소형(전용 85㎡ 이하)이어서 청약률에 대한 업계의 기대가 컸다. 그런데 1순위 청약자는 37명에 그쳤다. 같은 날 청약신청을 받은 화성시 조암 한라비발디 아파트도 1순위에서 11명, 2순위에서 2명이 청약했다. 지난달 30일 서울 구로구에서 청약 접수를 한 고척 월드메르디앙은 순위 내 청약률이 4%에 그쳤다. 같은 날 나온 은평구 역촌센트레빌 역시 3순위에서도 모집 가구 수를 채우지 못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건설업체 분양 관계자들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 않다. 미분양이 생기면 계약하겠다며 연락처를 두고 간 사람(이른바 사전예약자)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올 들어 10월까지만 해도 이런 사람들조차 없었으니 사정이 많이 나아진 것은 확실하다. 성복아이파크 김병석 소장은 “청약자보다 사전예약자가 훨씬 많아 모두 파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비록 순위 내 청약률은 바닥권이지만 전셋값이 계속 오르고 기존 주택시장이 움직이면서 분양시장도 나아지고 있다는 얘기다. 인천 검단 현대힐스테이트5차 이병현 분양소장은 “앞서 나온 아파트보다 분양가가 떨어지자 최근 새 아파트 단지에서 내 집을 마련하려는 수요자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수요자들은 순위 내 청약을 왜 그렇게 기피하는 걸까. 무엇보다 집값 전망이 불투명한 데다 아직도 공급이 많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런 상황에서 소득 감소 등으로 주택 수요는 줄었다. 현재 서울·수도권에서 분양 중인 물량(미분양 포함)은 공식적으로 3만 가구가 넘는다. 정부 통계에 잡히지 않은 미분양을 더하면 5만여 가구에 이를 것으로 건설업계는 내다본다. 현대경제연구원 박덕배 전문연구위원은 “경기 침체에 따른 소득 감소 등으로 기본적으로 주택 수요는 줄고 있다”고 말했다.

 즉 미분양 아파트가 흔한데 집을 사는 데 굳이 청약통장을 쓸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지난달 나온 인천 송도 롯데캐슬&해모로의 윤창기 분양소장은 “집값 전망도 밝은 편이 아니므로 청약은 건너뛰고 마음에 드는 층·향·동을 골라 계약하겠다는 실수요자가 훨씬 많았다”며 “청약 당첨자와 사전예약자의 계약률도 반반 정도였다”고 전했다.

 기존 주택경기가 확실히 살아나지 않는 한 서울·수도권 청약시장도 이런 분위기를 이어갈 것 같다. 순위 내(1~3순위) 청약을 기피하고 미분양 물건에 관심을 가지는 분위기 말이다. 신한은행 이남수 부동산팀장은 “실수요는 물론 투자자들이 청약에 나서야 높은 청약률을 기대할 수 있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집값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감이 더 확고해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황정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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