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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티샷하는 사람? 한국선 오너, 외국선 아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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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호 14면

“언니, 라이 좀 봐줘요.”
 골퍼들이 그린에서 경사를 봐 달라는 뜻으로 여성 캐디에게 흔히 하는 말이다. 남자가 여자를 “언니”라고 부르는 것도 적당하지 않지만 경사를 봐 달라는 말을 “라이를 봐달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라이(lie)는 공이 놓인 상태를 말한다. 러프나 경사지, 디벗 자국, 혹은 물이 고인 곳에 있을 때 “라이가 나쁘다”고 한다.

한국에서만 통하는 골프장 콩글리시

Lie는 골프에서 매우 중요한 말이다. Play it as it lies(놓인 그대로 친다)가 골프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lie는 한국 필드에서 다용도로 쓰인다. 경사(brake)도 라이, 그린에서 볼이 굴러가는 선(line)도 라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냥 “치기 어려운 자리에 떨어졌다” “그린의 경사가 어떤가” “공이 굴러갈 길이 어디인가”라고 묻는 것이 정확하다.

골프 코스에서 영어는 아직도 벙커에 빠진 상태다. 가장 고생하는 단어는 골프 그 자체다. 평소 ‘골프’라고 부르던 사람도 코스에 몇 번 나갔다 오면 ‘꼴프’라고 발음하는 경향이 있다. 먼저 골프를 시작한 동반자, 캐디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경음을 낸다. 발음이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더 강한 경음을 사용해 ‘꼴프’라고 발음해야 실력이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분위기는 아름답지 않다.

북한에선 티잉 그라운드를 출발대, 벙커를 모래 웅덩이, 그린을 도착지, 홀을 구멍, 아이언을
쇠채, 우드를 나무채, 드라이버를 가장 긴 나무채 등으로 부른다. 문화체육관광부도 골프 용어를 국어로 대체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적당한 용어가 있으면 우리말을 쓰는 것이 옳다. 그러나 ‘스포츠’를 교육적인 의미가 강한 ‘체육’에 뭉뚱그려 쓰자는 주장처럼 무조건 국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지나칠 수 있다. ‘쇠채로 도착지에 보내라’는 말은 어색하다. 언어는 골프 스윙처럼 항상 변하는 생물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도 가장 먼저 티샷을 하는 사람을 오너(owner)라고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 아너(honor)가 맞는 말이다. 아너는 전 홀에서 가장 적은 샷으로 홀아웃한 사람을 일컫는다. 다음 홀에서 가장 큰 명예를 가진 사람이고 가장 먼저 샷을 한다. 한국에선 돈 내기가 성행해서인지 전 홀에서 가장 잘 친 사람은 돈을 딴 사람이 되고 owner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골프는 돈이 아니라 명예를 중시하는 스포츠다.

골프 관계자들도 지나치게 외래어를 많이 쓰는 경향이 있다. 방송 종사자 중에선 “디펜딩 챔피언” 등 우리말로 충분히 쓸 수 있는 것은 물론 “스트롱한 어게인스트 윈드가 분다”라는 등 황당한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영어를 많이 쓰면 지식이 많은 것처럼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한데 골프를 보는 시청자들의 수준은 매우 높다.

TV 방송 해설자와 아나운서 중에서는 쓸데없이 영어를 써서 망신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공을 땅에 놓고 칠 때 리플레이스(replace)한다고 말하는 경우다. 공을 들었다가 닦고 ‘다시’ 놓기(place) 때문에 리플레이스를 쓰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리플레이스는 ‘다시 놓다’ 보다는 ‘대체한다’ ‘교환한다’는 뜻이 강하다. J골프 박원 해설위원은 “리플레이스는 공을 땅에 놓을 때가 아니라 라운드 중 볼이나 캐디를 바꿀 때 쓰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했다. 공을 놓는 것을 replace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바로 그 자리에 내려 놓아야 replace가 된다. 원래 자리가 아니라 다른 자리에 놓을 때도 리플레이스라고 습관적으로 하는 방송인이 있다.

골프장에서는 라운드 시작시간을 알려줄 때 “티업 시간은 8시”라고 한다. 티업(tee up)은 플레이를 위해 볼을 티펙 위에 올려 놓는 것을 말한다. 플레이를 시작한다는 말은 티 오프(tee off)다. 파 3홀에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뒷 조에 티샷을 하게 허용하는 것을 한국에서 ‘사인을 준다’고 한다. 사인은 야구 경기에서 감독이나 코치가 선수에게 보내는 것이다. 정확히는 사인이 아니라 시그널이 맞다. 골프에서 플레이어들끼리 시그널을 보내면 안 된다. 벌타를 받아야 한다. 꼭 영어로 쓰고 싶다면 웨이브(wave)를 보낸다고 해야 옳다.

국내 필드에서 샷을 실수해서 볼이 사람 쪽으로 날아갈 때 “볼~!!!”이라고 소리지르곤 한다.
한국에선 뭐라고 소리쳐도 별 상관은 없다. 그러나 혹시 미국에 가서 이런 일이 생길 땐 꼭 “포어(fore)”라고 외쳐야 한다. 그렇게 고함지르지 않고 사람을 맞히면 안전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 소송을 당해 큰 돈을 물어내야 한다. Fore는 앞을 조심하라는 look out before의 before에서 be를 뺀 것이라고 한다. 포병부대에서 포를 쏠 때 전방의 아군 보병에게 주의하고 몸을 숨기라고 쓴 말이다.

티샷을 하는 곳을 뜻하는 티박스도 정확한 용어가 아니다. 티잉 그라운드가 옳다. 과거 티펙이 생기기 이전 흙을 조금 쌓아 놓고 이 위에 공을 올려 놓고 티샷을 했다. 티박스는 이 흙을 넣어두었던 상자다. 그래서 티잉 그라운드에는 티박스가 있었다. 티박스는 박스처럼 네모난 땅이 아니라 상자다.

싱글 디지트 핸디캐퍼(single digit handicapper)를 싱글 혹은 싱글 플레이어라고 하는 것도 오
해의 소지가 있다. “너 싱글이냐”고 하면 미혼이냐는 뜻이고 싱글 플레이어는 혼자 경기하는 사람을 말한다. 내기를 할 때 핸디캡 차이 만큼 먼저 돈을 달라는 말인 “핸디를 달라”는 말도 처음 듣는 사람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한국 필드에서의 전문용어다. 미국에선 핸디캡 차이가 5면 “5를 달라”고 쉽게 말한다.

그린에서 볼의 위치를 표시하는 동전 등은 볼 마커가 아니라 볼 마크다. 한국의 골퍼들은 동명
사를 좋아한다. 라운드라는 말은 한 게임이라는 명사로 쓰이는데 굳이 동명사 라운딩으로 만들어 쓴다. 퍼트를 퍼팅으로 부르는 것도 적절하진 않다. 파 3를 숏홀, 파 4를 미들홀, 파 5를 롱홀로 부르는 것도 그렇다. 파 3홀 중에도 긴 것이 있고 파 5홀 중에도 짧은 것이 있다. ‘긴 숏홀’과 ‘짧은 롱홀’ 등의 국어와 영어가 혼합된 역설적인 표현은 골프 용어로는 적당하지 않다.

페어웨이 우드를 페어웨이 메탈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우드의 헤드가 이제는 나무가 아니라 금속(metal)이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러나 안경(glasses)은 요즘 유리가 아니라 플라스틱으로 만들지만 여전히 glasses라고 부른다. 우드도 고유명사로 자리를 잡았다. “금속으로 만든 것을 왜 우드로 부르느냐”고 반발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아이언(iron)도 요즘은 페이스 부분에 비철금속인 티타늄 등을 사용한다. 재질로 이름을 부른다면 어떤 아이언은 아이언, 어떤 아이언은 티타늄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미국의 PGA 투어는 매년 펴내는 연감의 둘째 페이지에 “우리는 PGA가 아닙니다”라고 써놓는
다. ‘PGA 투어’와 ‘PGA’를 헷갈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미국 PGA는 프로골프협회다. 클럽 프로와 레슨 프로를 포함한 프로 골퍼들의 모임이다. 미국 PGA 투어는 투어 대회에 나오는 선수들의 이익단체다. 대회에 나오는 선수들은 일반 프로보다 골프 실력이 좋다. 그들은 “재주는 우리가 부리는데 그 수익을 대회에 나오지도 못하는 프로들과 나누는 것이 싫다”면서 독립했다. 미국 투어를 말할 때는 PGA 투어라고 해야 한다.

한국에서 유러피언 투어를 EPGA라고 부르는 일이 흔하다. 미국 프로골프협회를 PGA라고 하니, 한국프로골프협회는 KPGA, 일본은 JPGA, 유럽은 EPGA라고 편하게 줄여 부른다. 그러나 유럽프로골프협회는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 단체다. PGA 유러피언 투어가 맞는 말이다. 일본 투어는 JGTO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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