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충격에 화장실 문 열고 용변 … 총 쏘는 토끼 모습 그린 어린이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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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피란민들이 임시 거처로 사용하고 있는 인천 인스파월드(찜질방)에서 아이들이 심리상담의 일환으로 미술치료를 받고 있다. 인천재난심리지원센터와 여성가족부는 찜질방 한편에 심리상담지원센터를 마련해 주민들의 정신적 안정을 돕고 있다. [최승식 기자]


“어머, 죄송합니다. 그런데 왜 문을 열고 계세요? 사람이 없는 줄 알았잖아요.”

 연평도 피란민들이 임시로 지내고 있는 인천시내 대형 찜질방 인스파월드. 이곳 여자 화장실에서는 이런 풍경을 매일같이 볼 수 있다. 김모(80) 할머니는 “피란 온 이후로 화장실에서 문을 닫고 볼일을 보려면 왠지 무섭다”고 말한다. 폭격 후유증이다.

 인천재난심리지원센터는 지난달 27일부터 이곳 한편에 심리안정지원상담소를 열어 주민들에게 상담을 해주고 있다. 5일 동안 이곳에 들른 주민은 110여 명. 찜질방에서 먹고 자는 300여 명의 3분의 1이 넘는다. 1명당 50분이 기본 상담시간으로 정해져 있지만, 폭격 당시 상황을 듣다 보면 1시간이 훌쩍 넘는다.

 송희숙 상담지원센터장은 “정신과 치료가 아닌 ‘심리적 응급처치’를 하고 있다”며 “초기에 치료하지 않으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을 겪을 수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피란민들이 공통으로 호소하는 건 ‘공포심’과 ‘무력감’이다. 송 센터장은 “주민들이 당시 상황이 계속해서 꿈에 나타날 정도로 공포감을 느끼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몰라 무력감을 느낀다”고 전한다.

 특히 중년 이상 여성 중에는 화장실 문을 닫지 못할 정도로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밀폐된 공간이 무서워서다. 이들은 엘리베이터도 이용하지 못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계단을 이용하고 있다. 주민들이 겪고 있는 또 다른 공통 증상은 ▶환청 ▶기억력 감퇴 ▶소화불량 ▶두통과 불면 등이다.

 공포와 무기력 뒤에는 ‘죄책감’도 있었다. 포탄이 떨어졌을 당시 죽기 살기로 도망을 쳐야 했던 상황을 이야기하다가 “나 혼자만 살겠다고 뛰었다”며 죄책감을 호소한다는 것이다. 송 센터장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임에도 두고두고 후회하는 이들이 많아 지속적인 돌봄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미취학 아이들의 고통도 크다. 연평도 공립어린이집 김명숙 주임교사는 “씩씩하게 어린이집에 잘 다니던 아이가 이곳에 와서 엄마와 떨어져 있지 못하는 ‘분리불안’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고 말한다. 상담소에서 아이들의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해 미술 치료를 진행한 결과, 토끼가 총을 쏘는 모습 등 공포감을 나타낸 그림도 보였다.  

이런 피란민이 많자, 여성가족부도 지원에 나서 지난달 30일부터 ‘가족보듬사업 가족지원실’을 찜질방 한편에 열었다. 가족 단위 위주로 상담을 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한다는 계획이다. 아이들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놀이방도 만들어 연평도 공립어린이집 교사 7명이 돌볼 수 있게 했다.

 정은지 담당은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도 6주~6개월 후에 큰 충격이 찾아올 수 있다”며 “천안함 사건 때도 유족들을 상담했었는데 6개월 후에 ‘죽고 싶다’며 고통을 호소해오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곽금주(심리학과) 서울대 교수는 “우울증과 떨림 증상 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언제 어느 때 올지 모른다”며 “검사 한 번으로 넘길 일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특히 아이들의 경우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해 외국에서는 5년 이상 상담을 하기도 한다”며 “정신적 건강 회복을 위한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연평도 피란 주민들의 임시 거처를 정하는 일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천시가 지난달 30일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보유한 전용면적 84㎡형 미분양 아파트 155가구를 임시 거처로 제공하는 방안을 대책위에 제시했으나 1일 주민들이 “지리적으로 불편하다”는 이유로 반대해서다. 이와 관련, 윤석윤 인천시 행정부시장은 “주민들이 분산되더라도 즉시 입주 가능한 인천시내 다가구 주택(400가구) 제공안과 12월 한 달간 이용 가능한 건설기술교육원 제공안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피란민들의 고충은 이뿐 아니다. 인천시교육청 ‘연평 초·중·고 정상화 태스크포스팀’이 학생 116명을 영종도의 운남초등학교에 배치하기로 결정했지만 해당 학교의 운영위원(학부모) 8명이 인천시교육청을 찾아가 항의해 물의를 빚고 있다. 이들은 초등학생은 괜찮지만 중·고생까지 초등학교에서 교육하는 것은 사고 위험 등이 있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인천시교육청 한상환 공보관은 “2일 오전 운남초교와 연평초·중·고교 교장선생님이 학부모들을 만나 설득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인천=임주리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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