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 웃다 80年] 5. 첫 무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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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 유랑극단에서 몸으로 익힌 연기는 나에게 피와 살이 됐다. 사진은 1975년에 주연을 맡았던 영화 "형사 배삼용"의 한 장면.

단원들은 '마치마와리'(거리 행진)에 나섰다. 유랑극단의 공연을 알리는 유일한 광고 수단이었다. 밴드가 맨 앞에 섰다. "따 따라따라라~." 그리고 사회자의 멘트가 이어졌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무대. 아~, 인생은 왜 이다지 슬프고, 사랑은 왜 이다지 아픈가.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무대가 오늘 밤 올라갑니다." 짙게 분장한 배우들은 깃대를 하나씩 들고 뒤를 따랐다. 깃대에는 단체명과 악극 제목, 극장 이름 등을 적었다. 나는 '쇠사슬'이란 제목이 적힌 빨간 깃대를 들었다. 일본인에게 핍박받는 조선 사람의 설움을 그린 악극이었다. 구슬픈 트럼펫 소리가 골목을 누볐고, 동네 꼬마들이 악단 행진의 꼬리를 물었다.

유랑극단 공연은 하루 한 회였다. 동네 사람들은 저녁을 먹고 나면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이 시간에 맞춰 공연이 올라갔다. 시간이 되자 배우들은 여관에서 극장으로 움직였다. 단장이 나한테도 낡은 옷 한 벌을 툭 던졌다. 일본인 경찰에게 붙잡힌 조선인 죄수 역이었다. "객석은 절대 쳐다보지 마.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3막짜리 악극에서 나의 출연 시간은 기껏해야 2분이었다. 그래도 첫 무대였다. 떨렸다.

막이 올랐다. 나는 '별 볼 일 없던' 단원 예닐곱 명과 함께 죄수 역을 맡아 무대에 올랐다. 일본 순사의 채찍질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만 하면 됐다. 단장의 사전 지시에도 불구하고 나는 객석이 궁금했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순간 관객의 눈길과 딱 마주쳤다. 어둠 속에서 먹이를 노려보는 살쾡이의 눈처럼 매서웠다.

그때 '일본 순사'의 채찍이 날아왔다. 멍하게 서 있던 나는 '퍽'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정면으로 코방아를 찧고 말았다. 너무 당황해 비지땀이 흘렀다. 우왕좌왕하다 겨우 무대 뒤로 퇴장했다. 코피가 흘렀다. 단원들은 한마디씩 쏘아붙였다. "앞 사람만 따라하면 되는데 그것도 못해?" "집에 가서 똥장군이나 지는 게 백 배 낫겠다."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러나 김화자(당시 24세, 1972년 작고)는 달랐다. 그는 우리 극단 최고의 여배우였다. 오똑한 콧날, 촉촉한 입술, 가느다란 허리에 검고 긴 생머리. 민협이 자랑하는 비극의 히로인이었다. 무대 뒤에선 남성들의 꽃다발이 줄을 이었다. 그런 여배우가 나에게 동정을 베풀었다. "첫 무대에선 누구나 다 그래요." 그는 부러진 콧등에 직접 '맨소리다무'(맨솔래담의 일본식 발음)를 발라 주었다. 그때는 비상약이 두 가지 뿐이었다. 멍이 들면 '맨소리다무', 까지면 '아카징키(소독약)'였다.

그때까지 내 얼굴을 만졌던 여자는 어머니와 외할머니 뿐이었다. 술을 안 마셨기 때문에 술집 작부의 손을 잡아본 적도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설쳤다. 새벽 첫 닭이 울 때까지 이리저리 뒤척이기만 했다. 첫 무대의 낭패감 때문이 아니었다. 김화자의 손이 콧등에 닿았을 때의 따스함, 그 여운이 밤새 나를 흔들었다.

배삼룡 <코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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