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 전국에 생생히 전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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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우리는 오늘날의 CNN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아무도 보도하지 못하던 진실을 세계에 알린 거죠.”

 전응덕(78·사진) 중앙일보 고문은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시작된 3·15 부정선거 규탄 데모 현장을 취재하던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 부산 MBC 보도과장이던 전 고문이 현장에서 녹취한 생생한 목소리는 라디오 전파를 타고 전국 각지에 퍼져나갔다. 한 달 뒤 서울에서는 4·19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NHK·아사히방송 등 일본 방송사가 그의 보도를 인용하면서 4·19혁명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제50주년 4·19혁명 기념사업회(회장 이기택)는 29일 “4·19 혁명정신을 계승·발전시키고 민주 창달과 사회정의 구현 및 인권 신장에 기여한 공로로 전응덕 선생에게 4·19혁명 정의상을 수여한다”고 밝혔다. 기념사업회는 올해 혁명 50주년을 맞아 당시 큰 공을 세운 단체와 개인을 선정해 4·19혁명 민주대상, 정의상, 자유상을 수여한다. 정의상을 받는 전 고문은 이 중 유일한 개인 수상자다. 민주대상은 동아일보사가, 자유상은 4월 혁명 교수단이 받는다.

 독재정권 아래에서 언론 자유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50년 전의 상황을 전 고문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15일 마산에서 시위 소식이 들어오자마자 첫 보도를 내놓고 그날 저녁 마산에 들어갔습니다. 경찰의 삼엄한 검문을 몸싸움으로 뚫어야 했어요. 시내 곳곳에서 벌어진 폭력사태에 마산 시민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습니다.”

 전 고문은 현장의 소리를 녹음해 보도했다. 라디오 중계차를 보내 생중계 방송도 했다. 당시 부산 MBC는 발칵 뒤집혔다. “경남 경찰국장이 주조정실 안에 권총을 차고 들어와 ‘이런 식의 방송이 계속되면 죽음을 각오하라’고 위협하더군요. 그러나 보도를 조금도 늦출 수는 없었습니다.” 전 고문은 “그때가 방송 기자들이 처음으로 저널리스트의 역할을 시작한 때”라고 말했다.

 그는 혁명 이듬해인 61년 서울MBC 보도국장으로 발령이 났으며, 64년 동양방송(TBC) 개국과 함께 자리를 옮겨 11년간 방송보도의 초석을 다졌다. “TBC에서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자유로운 분위기에 매료됐어요. 그때 우리는 TBC에서 정의의 목소리를 전했습니다. 당시 메이저 방송사들에서 국장급 인사 수십 명이대거 이동해오면서 TBC는 3년 만에 TV-라디오 전 부문에서 시청률과 청취율 1위의 쾌거를 이뤄냈습니다.”

 그는 5·16 직후 ‘선동방송의 주역’으로 몰려 구속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단 한 번도 내 행동을 후회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언론이 민심의 한가운데에 서 있을 때에는 두려울 게 없는 법입니다. 민주주의가 없으면 제대로 된 언론도 살 수 없으니까요.” 시상식은 30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다.

글=심새롬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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