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지역보육시설 지원하고 ‘보육 쿠폰’ 받아 직원 육아 돕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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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저출산 문제 해결, 기업인의 눈으로 꼼꼼하게 따져보니 새로운 길이 보이더라.”

 현대백화점그룹 경청호(57·사진) 부회장은 요즘 ‘저출산 대책 전도사’를 자처하고 다닌다. 국회의원·공무원·경영자 단체 관계자들을 만날 때마다 ‘보육 쿠폰’을 도입하자고 설파하고 다닌다.

 보육 쿠폰이란 경 부회장이 구상한 아이디어다. 정부가 설치를 권장하고 있는 직장 보육시설보다는 지역 보육시설을 크게 늘려 육아 부담을 덜어주자는 취지다. 기업들이 직장 보육시설을 만드는 데 들일 돈을 지역 보육시설에 지원하자는 것이다.

정부는 보육관리원(가칭)을 만들어 기업이 낸 기금으로 기존 보육업체들의 시설을 개선하고 보육 교사를 지원하는 데 쓰고, 기업들은 지원한 돈만큼 보육 쿠폰을 받아 직원들에게 지급하는 방식이다. 기업들도 들인 돈만큼의 혜택을 직원들과 나눌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이렇게 하면 지역 보육시설이 훨씬 나아지고, 직장 보육시설이 없는 중소기업 직원들도 이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돼 상생 측면에서도 긍정적”이라는 게 경 부회장의 생각이다.

 경 부회장의 아이디어는 며칠 만에 ‘번쩍’ 생겨난 것이 아니다. 공무원과 보육시설 관계자는 물론 자녀를 둔 지인들을 두루 만나 얘기를 들었다. 또 해외 자료도 찾아가며 몇 달을 고민했다. 경제 효과와 효용성을 따지는 기업인의 시각에서 보니, 같은 비용을 들이고도 훨씬 효과가 높은 길이 있는데 외면할 수 없었다.

 유통업 최고경영자(CEO)가 저출산 대책 마련에 이같이 공을 들이는 이유는 뭘까. 인구 감소는 소비자 감소로 이어지기 때문에 유통업 CEO가 소홀히 여길 문제가 아니다. 회사 내 여성 근로자 비율이 높아 여성의 생산성을 높이는 일이 기업 경쟁력과 직결된다는 점도 경 부회장을 고민하게 했다. 현대백화점 정규직 1400여 명 중 여직원은 600명으로 43%에 달하고, 협력업체까지 합치면 3만5000여 명 중 74%나 된다. 경 부회장은 어린 손녀 두 명을 둔 할아버지로, 맞벌이를 하는 자신의 딸들이 육아 대책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더 큰 이유는 직장 보육시설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현대백화점그룹은 이미 유통업계 최초로 1997년 정원 27명의 ‘현대백화점 어린이집’을 설치한 바 있다. 하지만 매년 이용자가 7~10명에 그쳐 노조와의 협의 끝에 2002년 문을 닫고 말았다. 산업단지같이 직원들이 밀집한 지역은 직장 보육시설이 필요하지만 그렇지 않은 지역은 직장 보육시설이 오히려 더 불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9월 자녀가 있는 현대백화점 남녀 직원 436명에게 설문을 한 결과도 경 부회장의 이 같은 생각과 부합했다. 응답자 중 71.7%가 “육아 시설이 회사 근처가 아닌 집 근처에 있었으면 한다”고 대답했고, 직장 근처를 원한 응답은 28.3%에 그쳤다. 기업들이 무작정 직장 보육시설을 늘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이 드러난 셈이다. 경 부회장은 “정부·기업이 합심해 돈(재원)과 시스템에 대한 지혜를 모으면 같은 경제적 비용으로 훨씬 높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최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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