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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공포’ 짓눌린 아이들, 원어민 수업 듣고 얼굴 활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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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29일 인천시 당하동 인천영어마을에서 연평도 학생들이 영어체험학습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있다. 인천시교육청은 다음 달 4일까지 5박6일 동안 연평도 학부모의 요청에 따라 학생들이 인천영어마을에서 숙식하며 공부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최승식 기자]


“뚜껑 열린 차를 영어로 뭐라고 할까요?”

 “우리 아빠 차요.”

 29일 오후 인천시 서구 당하동의 인천영어마을. 연평도 아이들이 모처럼 포탄의 공포를 잊고 웃었다. 초등학교 1, 2학년 16명이 배정된 반에서 선생님이 ‘스포츠카’에 대해 묻자 이곳저곳에서 아이들의 대답이 우렁차다. 뚜껑 없는 아빠의 트럭이 아이들 눈에는 곧 스포츠 카였다.

 연평도 주민 피란민들의 임시 숙소인 인천 인스파월드에서 지내던 초·중·고생 100여 명이 이날 영어마을을 찾았다. 5박6일간 이곳에서 먹고 자며 영어를 공부하기로 한 것이다. 영어마을은 인천시의 위탁을 받아 유아교육 전문기관인 글로벌 에듀가 2006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혜린이(연평초2)와 민희(연평초2)도 손을 꼭 붙잡고 들어왔다. 자매가 없는 두 아이는 늘 붙어 다닌다. 섬에 포탄이 떨어졌을 때도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연평도에 군인인 아빠를 남겨두고 온 민희를 토닥인 것은 혜린이고, 찜질방이 “너무 답답하고 더워 죽겠다”며 힘들어하는 혜린이를 안아준 이는 민희다.

  “트럭이 불타는 걸 봤어요.” 혜린이는 덤덤한 듯 말하지만 찜질방에 있는 동안 두 아이는 내내 침울했다. 좁은 공간에서 할 일이 없었다. 답답하고, 시끄러웠다. 엄마도 우울해 보여 말을 걸지 못했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두 아이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난생 처음 보는 외국인 선생님도 신기하기만 하다. “저 선생님 금발인데 되게 신기하다” “키도 엄청 커” 속삭이느라 정신이 없다.

 전날까지 말이 없던 한솔이(연평초1)도 다시 예전 모습을 되찾았다. 아이는 엄마, 동생 2명과 함께 연평도를 떠나왔다. 찜질방 한편에 있는 PC방에서 컴퓨터 게임도 하고 싶었지만 형들의 눈치가 보였다. 한·미 연합훈련이 있던 날, 아이는 누구의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군 복무 중인 아버지가 연평도에 남아 있어서다. 영어마을에서의 수업은 아이에게 다시 평안함을 가져다 줬다. 선생님이 묻는 말에 “저요, 저요”를 가장 큰 소리로 외치는 것도 한솔이다.

 중학생과 고등학생들도 각각 체육교실, 음악교실로 꾸며진 곳에서 수업을 받았다. 이자영(연평중3)양은 “찜질방에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데, 바람도 쐴 겸 이곳이 반갑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이곳에서 수업을 받게 된 것은 인천영어마을 측의 배려다. 연평도 주민들을 도울 방법을 고민하던 영어마을 선생님들은 이곳에서 아이들을 교육하기로 했다. 김성겸 교학부장은 “1인당 48만원(자비 12만원·시비 36만원)이 드는 영어마을 수업이지만, 무료로 가르치기로 했다”며 “이국적인 문화를 접하고, 함께 떠들며 공부하다 보면 아픔이 조금은 덜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프로그램은 그대로이지만 ‘영어만 써야 한다’는 규칙은 적용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최대한 스트레스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또 원어민 선생님 옆에 한국인 선생님을 배치해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걸 돕고 있다.

 학부모들은 물론 연평초·중·고교 선생님들도 반기고 있다. 허윤숙 연평초등학교 1학년 담임교사는 “교육청에서는 주변의 학교에 갈 수 있도록 해줬지만, 학생들의 적응을 걱정하는 부모님들이 많아 대부분이 학교에 가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애들이 밝아져서 너무 다행”이라면서도 “‘쿵’ 소리가 나면 놀라는 아이들이 있어 걱정이 돼 이곳까지 따라왔다”고 말했다.

 오후 6시. 저녁식사 시간이 됐다. 혜린이가 눈이 안 보일 정도로 웃으며 물었다.

 “언니, 연평도 며칠 몇 시에 놀러올 거예요?”

인천=임주리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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