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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소도 파괴 … 주민은 ‘전쟁공포’로 고함, 두통 호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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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연평도에 긴급 투입된 가천길병원 대량재난팀이 환자의 몸에 붕대를 두르고 있다. [가천길병원 제공]

23일 오후 3시 연평도 소식이 알려지면서 병원 본부에서 ‘비상 대기’ 지시가 떨어졌다. 가천의대 길병원 조진성(35·응급의학과) 교수는 소방방재본부에 출동의사를 타진했고 그쪽에서도 출동을 요청했다. 길병원은 보건복지부의 위탁을 받은 인천 서해권역응급의료센터로 유사시 응급의료팀을 꾸린다.

 우선 연안부두로 달렸다. 오후 4시50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평도에 들어갈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태는 생각보다 심각하게 돌아갔고 연평도행을 결심했다.

 “연평도의 안전이 완전히 확보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원하지 않으면 배를 타지 않아도 됩니다.”

 조 교수는 길병원 대량재난팀원 이수복(30) 응급전문의, 김진영(34·여)·김미지(25·여) 응급구조사, 운전사 홍기우(54)씨에게 물었다. 그때까지 알고 있는 정보라고는 2명이 숨졌고 10여 명이 부상했다는 정도였다. 포격이 더 있을지도 몰라 자칫하면 팀원들을 위험한 상황에 빠뜨릴 수도 있었다.

 “민간인 환자가 많을 수 있고 특히 중환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섬으로 가겠습니다.”

 마치 전쟁터로 떠나는 병사처럼 팀원들의 각오는 비장했다. 조 교수는 가족에게 연평도행을 알렸다. 아내 김해은(32)씨는 “몸 조심하세요”라고 짧게 당부했다. 수아(4)·수민(2) 두 딸이 감기에 심하게 걸린 점이 맘에 걸렸다. 관계당국 협의에 시간이 걸려 오후 10시에 화물선에 소방차 20대, 응급차 2대를 싣고 군 당국의 호위를 받으며 연평도로 향했다.

 24일 새벽 4시. 바다에서 바라본 섬은 암흑천지였고 군데군데 산불이 번지고 있었다. 배 문을 열자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찔렀다. 화약과 나무 타는 냄새였다. 도로 곳곳이 파여 있었고 길가에 작은 불이 붙어 있었다. 끊어진 전선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복구작업을 하다 어깨가 빠진 해양경찰을 먼저 진료한 뒤 오전 6시에 정식 진료를 시작했다.

 49세 남자는 포탄이 떨어진 뒤 불을 끄다 가슴 통증을 심하게 느꼈다. 협심증이었다. 내버려두면 심근경색으로 악화될 수 있어 인천 길병원으로 후송했다. 27세 남자환자는 포탄이 떨어질 때 창문이 날아와 허리와 어깨를 치는 바람에 심한 요통을 호소했다. 두 명은 포탄 파편에 얼굴을 베였다. 7명은 충격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을 제대로 못 쉬는 불안증세를 호소했다. 조 교수는 “많은 주민이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에 흥분해 있었다. 두통·어지럼증을 호소했고 술을 마시기도 하고 면사무소 앞에서 소리를 질러댔다”며 “화를 제대로 분출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24일 정오 무렵 수돗물이 끊겼다. 정전 때문에 물을 끌어올 수 없었다. 온종일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환자가 줄면서 동네를 둘러봤다. 포탄을 맞은 데는 6·25전쟁 사진과 다를 바 없었다. 한편으로는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언제 북한이 포탄을 퍼부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다행히 포격으로 망가졌던 보건지소가 복구되면서 조 교수팀은 25일 오전 8시30분 섬을 떠났다. 28시간 남짓 체류했지만 조 교수팀에는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이런 현장 진료는 다른 분야 의사가 하기 힘든, 응급전문의사의 영역입니다. 이런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 역할을 했다는 점에 자긍심을 느낍니다.”

 조 교수는 “재난 현장에 투입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많이 느꼈다”고 했다.

신성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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