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찬 바닥서 집무해 늘 감기에 시달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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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 단국대 명예교수가 지난 18일 서울 이원아트홀에서 열린 한독의학회 모임에서 강연 도중 분쉬 박사의 한국 체류 일기 번역본을 들어 보이고 있다. [한독의학회 제공]

“고종은 오랫동안 만성 감기에 시달렸습니다. 낮까지 잠을 자고 오후 3시에 일어나 새벽 동틀 때까지 쭈그리고 앉아 있다 가끔 마당을 가로질러 궁 안 이 건물 저 건물로 건너 다녔다고 합니다. 쉽게 차가워지는 비단 옷만 입고, 집무 공간 바닥이 찬 것도 만성 감기의 원인이었습니다.”

 지난 18일, 마포구 이원아트홀에서 열린 한독의학회(회장 이상복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 2010년도 모임에서는 특별한 사람이 초대됐다. 우리나라 첫 번째 황실 외국인 의사였던 독일인 리하르트 분쉬 박사의 한국 체류 일기(日記)를 구해 번역한 김종대 단국대 명예교수이다. 그는 “분쉬 박사는 고종이 임기 중이던 1901년부터 을사늑약이 맺어진 1905년까지 고종의 시의(侍醫)를 담당하며 고종과 일제 강점 직전 한국 정치·생활사에 대해 자세히 기록했다”고 말했다.

 분쉬 박사는 1901년 당시 일본 황제 시의였던 벨츠 박사의 추천으로 한국에 오게 됐다. 이상복 회장은 “그는 유럽의 근대의학 토대를 세운 루돌프 박사 밑에서 수련 받던 전도 유망한 의사였다. 당시 미지의 땅이었던 한국에 정착해 한국 보건·의료 역사에 초석을 닦은 공이 크다”고 말했다.

 분쉬 박사는 고종의 병을 돌봤을 뿐 아니라 민간인들을 위한 병원도 세워 진료했다. 당시 서민들은 돈이 없었다. 제왕절개를 해 죽을 고비를 넘긴 여성은 참외 한 개를 진료비로 내고, 절단 수술을 받은 남성은 닭 열 마리를 진료비로 지불하는 식이었다. 방역 체계도 세웠다. 당시 궁궐 밖 마을에는 화장실이 따로 없었다. 아침에 길거리에 대변을 누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는 식이었다. 콜레라가 돌자 길거리 여기저기 방치된 배설물 속 대장균이 우물, 음식물, 옷 등으로 옮겨 다니면서 병이 급속히 퍼졌다. 분쉬 박사는 고종황제에게 건의해 도로 청소와 오물 수거 체계를 수립하고 식품 판매 감독 체계도 만들었다. 석회를 싼 값에 보급하도록 하고 공동 우물을 관리하는 조항을 만들기도 했다. 분쉬 박사는 을사늑약 후 고종이 폐위 위기에 몰리면서 일본 정부의 압력으로 한국을 떠나게 됐다.

 약 90년 후, 독일계 다국적 제약회사인 한국 베링거인겔하임에서는 분쉬 박사의 업적을 기리며 분쉬의학상을 제정했다. 분쉬의학상은 올해로 20회를 맞으며, 매년 뛰어난 의학자에게 총 5000만원의 상금과 상패를 수여한다. 이날 또 다른 특별 손님으로 초대된 분쉬 박사의 외손녀 게지네 페릭스 박사는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의학상이 20년째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 가문의 영광이다. 모든 가족을 대표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상복 회장은 “한국은 개화기부터 독일과 많은 의학적 교류가 있었다. 앞으로도 더 많은 교류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날 모임에는 한만청 전 서울대병원장, 이순형 전 서울대 의대 학장, 한스울리히 자이트 주한 독일대사, 군터 라인케 한국 베링거인겔하임 사장 등 100여 명의 인사가 참석했다. 

배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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