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 “아직 끝나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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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설 입찰에서) 지나치게 높은 금액을 써내면 현대그룹의 전략에 말려드는 것이다.”

 본입찰 마감을 앞둔 이달 초 서울 양재동 현대자동차그룹의 현대건설 인수팀에 정몽구 회장의 이런 지시가 떨어졌다. 인수팀장을 맡은 조위건 엠코 사장과 기획조정실 3팀 멤버들은 고민에 싸였다. 인수팀이 입수한 정보는 ‘현대그룹이 5조원 가까이 써낸다’는 것이었다. 인수 컨설팅을 맡은 삼일회계법인이 산정한 적정 인수금액은 4조3000억원이었다.

 인수팀은 가격을 놓고 고심하다 5조원을 일단 상한선으로 정했다. 본입찰 마감일인 15일 정 회장의 별도 지시는 없었다. 인수 금액란에는 ‘5조원’을 약간 웃도는 5조1000억원을 써낸 것으로 전해졌다.

 정 회장은 2001년 현대그룹에서 현대차그룹으로 분리한 이후 지난해까지 현대건설 인수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현대건설이 대북사업을 추진하면서 어려움을 겪는 것을 지켜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정치와 연관된 대북사업에 발을 담가서는 안 된다’는 게 정 회장의 평소 경영 지론이다.

 정 회장이 현대건설에 관심을 보인 것은 지난해 말이다. 기획조정실에서 재계 1위인 삼성그룹과 매출 격차를 분석한 게 시작이었다. 40조원 이상 차이가 나는 삼성을 따라잡으려면 주력사의 매출을 늘리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고, 대형 인수합병(M&A)이 필요하다는 게 골자였다.

 올 상반기 정부와 채권단이 현대건설 매각을 서두르면서 상황은 급박해졌다. 이어 ‘현대건설 인수’를 결정한다. 경쟁자인 현대그룹에 비해 자금력이 월등해 인수에 자신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건설 인수전이 치열해질수록 상황이 꼬여갔다. 현대그룹이 이른바 ‘네거티브 광고’를 통해 현대차그룹의 인수 자격을 따지고 든 것이다. 그룹 안팎에서 현대건설 인수에 대한 회의적인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 회장은 무엇보다 이번 인수전이 집안 싸움으로 비춰지는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자연히 현대그룹의 네거티브 광고 공세에도 소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인수 가격을 쓸 때도 뒷감당이 어려울 정도의 무리수는 두지 않는다는 쪽으로 정했다. 고심 끝에 시장의 예상가보다 1조1000억원, 삼일회계법인이 추산한 적정가보다 8000억원을 더 써냈으나 결과는 패배였다.

 입찰 결과에 대해 그룹 관계자는 “아직 인수전이 끝나지 않았다고 본다” 고 말했다.

김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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