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 총리님, 소는 누가 키우나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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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호 31면

#장면1. (일반화하기 어려운 경험이긴 하지만) 15년 전쯤 일이다. 출근길 지하철 1호선 승강장 신문판매대. 판매대 앞에서 각 신문의 1면 기사를 쭉 읽고 있었다. 내가 쓴 기사도 있었기에 꽤 집중해서 봤다. 옆구리에 누군가의 ‘뜨거운 눈길이 느껴졌다. 돌아봤다. 50대 아저씨가 고개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째려보고 있다. “무슨 일?” 그가 중얼거리듯 한 대답에 기가 막힌다. “어디 여자가 아침 댓바람에 턱 내밀고 신문을 보고 있어?” 여자가 팔짱 끼고 신문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에 심사가 뒤틀린 게 분명하다.

On Sunday

#장면2. 인기가 한창인 KBS 개그 콘서트의 두분 토론 코너. 남자가 하늘이라는 남하당(黨) 대표 박영진이 말한다. “여자가 어디 운동을 해. 설거지하고 빨래하는 자체가 운동이지. 나 때는 여자들이 따로 운동할 수 있는 건 새마을 운동밖에 없었어. 뭐~S라인? 건방지게. 운동하고 몸매관리하고, 그러면 소는 누가 키울 거야. 소는.” 여자가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는 여당당(黨)의 김영희가 반박한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그죠? 그 소, 니나 키우세요~.”

#장면3. 11일 오후 이화여대 음대 김영의 홀.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이화여대 측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뒤 학생 300여 명에게 강연했다. “더 많은 여성이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주요 20개국(G20) 회의 같은 세계 무대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여학생들이 도전해야 한다.” 학생들은 환호했다. 이번 G20 정상회의에는 전 세계에서 활약 중인 여성 정상(頂上) 17명 가운데 G20에 속한 4명의 여성 지도자가 참석했다. 메르켈 총리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 당선인, 줄리아 길라드 호주 총리다.

한국의 젊은 여성들에게 꿈과 도전을 설파한 메르켈에게 개그 콘서트의 남하당 박 대표는 이렇게 얘기했을 법하다. “이 나라 저 나라 설치고 돌아다니면 소는 누가 키울거야. 소는.”
지상파 TV가 여성 비하와 남녀 대결 상황을 코미디 소재로 거리낌 없이 쓰고, 시청자들이 이를 즐기는 것은 역설적으로 대한민국 여성들의 지위가 그만큼 높아졌다는 얘기다. 15년 전 기자가 겪은 지하철 사건도 황당한 옛얘기이고, 요즘엔 “여자 운전자들이 교통체증 주범”이란 식으로 대놓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다르게 읽힌다. 한국의 성평등지수를 보자. 한국은 평가기준에 따라 130여 개국 가운데 20위(UNDP)부터 100위(WEF)까지를 오르내린다. 전 세계에서 여성 의원 비율은 78위, 고위관료 비율로 본 순위는 111위에 그친다.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3개 회원국 중 남녀 간 임금격차는 가장 크다. 여성 비정규직 비율은 남성이 45%인데 비해 여성은 70%나 된다는 통계도 있다. 여성을 상품화하는 세태도 더하면 더했지, 덜한 것 같진 않다. ‘어디 여자가 건방지게’라는 남하당식 문화가 아직도 진행형이란 증거가 아닐까. 여성에게 기회의 창이 동등하게 주어지고 그 능력이 제대로 대접받는 것은 인간권리의 문제이기도, 우리의 미래가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여자가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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