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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대표의 빨간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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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2006년 6월 임기를 마치면서 손학규 경기지사는 『손학규와 찍새, 딱새들』이라는 책을 냈다. “찍새들이 세계를 돌며 외국의 첨단기업들을 찍어서 데려오면 딱새들이 온몸을 던지는 행정지원으로 투자 유치를 성공시켰다.” 지사 시절 114개 기업으로부터 141억 달러의 투자를 유치했다고 그는 기록했다. 책에는 경기도 파주 LG필립스LCD를 비롯해 여러 기업을 유치한 생생한 비화가 들어있다. 손 지사와 찍새들은 외국 공항에서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정열적으로 바쁘게 세계를 날아다녔다.

 손학규에게 젊은 날의 빈민·노동운동은 소중한 기억이다. 그러나 도전과 성취로 보자면 ‘지사 4년’이 훨씬 굵직한 매듭을 남겼다. 지사 손학규는 철저히 실용적이었으며 좌파이념의 희미한 그림자 따위는 없었다. 성취의 크기에서 LCD 단지는 이명박 서울시장의 청계천 못지않은 것이었다. 아니 더 큰 것이라고 손학규는 믿고 있을 것이다.

 좌파운동권 출신 교수를 CEO형 도지사로 바꾸어준 것은 한나라당이었다. 13년 동안 그는 한나라당의 이름으로 3선 의원, 보건복지부 장관 그리고 지사를 지냈다. 한나라당은 그를 발육시킨 모유이자 모태였다. 그런데 그런 당을 버리고 손학규는 민주당으로 갔다. 자신을 키워준 당을 떠난 이들은 많다. 92년 박태준·이종찬·박철언, 95년 김종필, 97년 이인제 그리고 2007년 이회창···. 이들 모두는 나름의 명분으로 한나라당을 공격했다. 그러나 손학규처럼 당의 역사와 정체성에 칼을 던진 이는 없다. 2007년 3월 탈당하면서 그는 “한나라당은 군정(軍政)의 잔당들과 개발독재시대의 잔재들이 버젓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바로 한달 전 그는 “내가 한나라당의 기둥이자 그 자체”라고 말했었다. 손학규의 탈당 방식은 지독한 자기 부정(否定)이자 배도(背道)였다.

 정치인이 배신이란 비난까지 들으며 탈당할 때는 뭔가 새로운 개혁을 해내야 하는 법이다. 자신의 공약대로 ‘낡은 정치의 틀’을 깨는 걸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지금 손 대표는 거꾸로 낡은 틀에 더 갇혀있다. 아니 어떤 면에선 ‘새로운 낡은 틀’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난 한 달 동안 그는 오류와 선동을 고스란히 반복했다.

 그는 4대 강 사업으로 하천부지 배추 경작이 줄어 배추값이 폭등했다고 주장했다. 관훈토론회에서 질문자는 “정부는 전국의 채소 경작지에서 하천부지는 1.4%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배추값이 폭등하나”라고 물었다. 그는 “16%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반박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하천 경작지가 10배 늘었단 말인가. 대통령이 되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인가. “통계청에서는 우리나라 인구가 5000만이라고 하지만 5억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는 4대 강 사업은 ‘위장된 운하사업’이라고 주장한다. ‘운하’ 주장은 미국산 쇠고기를 놓고 벌어졌던 ‘미신(迷信) 소동’과 비슷하다. 상식과 과학으로 볼 때 명백히 그렇다. 그런데도 손 대표는 대운하라고 몰아붙인다. 2008년 8월 촛불사태 때 그가 야당대표였다면 미신 소동이 더욱 크게 벌어졌을지 모른다. 소신은 다른데 당을 따르자니 그러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게 무슨 새 정치인가. 관훈토론에서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천안함이 북한 소행이라는 걸 안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안보나 국민생활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안 믿는 사람들’이 유엔에서 정부 일을 훼방 놓고, 중국이 그런 이들을 이용했고, 지금도 국론이 갈라져 있는데 그는 ‘무슨 문제’란다.

 한나라당에 있을 때 그는 정상적이며 실용적인 지도자였다. 민주당 대표가 돼서 그는 오히려 이념에 휩쓸리는 비정상적 지도자가 되고 있다. 이런 걸 보여주려면 왜 탈당이란 독배(毒杯)를 마셨나. 무엇을 죽이고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려 했는가. 춘천에 있는 손학규의 닭들은 도대체 무슨 새벽을 알리려 그렇게 울었는가.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