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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환영의 시시각각

역사 수정주의의 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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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중앙SUNDAY 지식팀장

“공화정체에선 ‘공식 역사’라는 게 없다. 역사 서술은 법이 아니라 역사가들이 할 일이다.”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1995~2007년 재임)이 한 말이다. 이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부주석의 지난달 25일 발언에 대한 중국 정부의 입장과 대조적이다. 시 부주석은 “위대한 항미원조전쟁(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었다”고 강조했고, 마자오쉬(馬朝旭)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시 부주석의 발언은 중국 정부를 대표해 천명된 입장으로 중국의 정론(定論)”이라고 밝혔다.

 공식 역사나 정론이 있건 없건 세계 각국은 지금 역사 수정주의(revisionism), 즉 ‘역사 다시 쓰기’의 홍역을 앓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2009년 러시아에 불리한 국내외 역사 다시 쓰기에 대응하기 위한 대통령 직속 위원회를 설립했다. 러시아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승리 등 스탈린의 업적을 재평가하는 한편 제2차 세계대전 발발에 히틀러뿐만 아니라 스탈린도 책임이 있다는 식의 해외 일부 학계의 주장에 적극 대응할 태세다. 소련 시대의 조크 중에는 “러시아는 과거를 예측할 수 없는 세계 유일의 나라”라는 게 있다. 해외 학계는 러시아의 역사 수정주의가 어떻게 전개될지 주시하고 있다. 중국도 주시 대상이다. 중국도 앞으로 전개될 정치 발전 과정에서 역사 다시 쓰기를 피할 수 없다. 중국이 과거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당시의 희생을 어떻게 역사적으로 서술할지 주목된다.

 역사 다시 쓰기는 강대국 지위를 되찾으려는 러시아나 초강대국의 길을 걷고 있는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부 유럽 선진국들과 미국은 역사 수정주의라는 통과의례를 진작부터 밟아왔다. 그 결과 부르주아 계급이 일으켰다는 게 정설이었던 프랑스 혁명의 성격이 불투명해졌고 중세는 이제 ‘암흑 시대’가 아니었던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미국에선 역사를 둘러싼 논란이 국론 분열로 확산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지난달 초 텍사스주 교육위원회는 초·중·고등학교 교과과정 지침을 ‘우편향’으로 대폭 손질하기로 해 논란이 일고 있다. 미국 학계·교육계의 ‘좌편향’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것이다. 미국 교육계에는 ‘중도좌파, 좌파, 극좌’만 있고 우파는 없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역사 다시 쓰기가 수십 년간 전개된 것이 사실이다. 공립학교 역사교과서가 반(反)기독교, 친(親)이슬람 내용으로 가득하다는 게 우파의 시각이다. 특히 매년 11월 넷째 목요일에 지내는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의 유래에 대한 ‘리버럴(liberal)한’ 역사 서술에 대해 우파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신(神)에 대한 감사보다는 겨울을 무사히 나게 도와준 인디언들에게 감사한 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라는 것이다.

 선진국과 비선진국을 가르는 차이 중 하나는 역사 서술상의 다원주의다. 선진국에는 역사 서술의 다양성이 자유이자 권리로 보장받는다. 선진국 진입 과정에 치르는 진통에는 동성연애, 교내 체벌 금지 문제 등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이미 역사 수정주의 시대의 도래를 체험했다. 역사 수정주의는 좌파·우파 모두에서 제기됐다.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해 “총을 누가 먼저 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해석이나, 일제 식민지배에 대해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는 주장은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줬다. 최근 조봉암 사건 재심 결정과 같이 역사의 재해석과 재조명을 요구하는 사례는 앞으로 더 많아질 가능성이 크다.

 역사를 둘러싼 갈등이 국내외에서 격화될 가능성이 크지만 불행히도 우리에게 모범 사례는 없다. 역사 수정주의는 세계 각국이 공통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현재의 사안이기 때문이다. 중견강국(middle power)이 된 대한민국은 그 위상에 맞는 역사 서술 모델이 필요하다. 역사 수정주의의 충격을 최소화해 국론분열을 막는 한편 대외적으로도 역사를 국력 증진과 국가 이익 수호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

김환영 중앙SUNDAY 지식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