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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비만, 자랑거리에서 조롱거리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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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915년 매일신보에 실린 화평당약방의 ‘자양환(滋陽丸)’ 광고. “복용하는 데 따라 건강을 증가하고 차차 비만강장케 됨은 이 약이 제일”이라는 문구가 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쓰던 시절이라 진보·발전을 나타내는 화살표 방향도 왼쪽을 향했다.

신분제의 역사는 역사시대 전체보다 길지만, 몸에 특별한 표지를 달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귀족들은 신분을 표시하기 위해 여러 장치를 동원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의복과 장신구였다. 옷감의 재질과 색깔, 귀금속과 보석을 사용한 장신구는 신분제 출현 당시부터 보편적으로 이용된 표지였다.

 그러나 이런 장식품들은 벗겨내면 그만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귀족을 욕보이는 가장 흔한 방법은 홀딱 벗겨놓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발가벗은 상태에서도 보통 사람과 구별될 수 있도록 신체에 견고하게 달라붙은 표지를 만들려 애썼다.

 인류사의 전 기간을 통해, 평생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 보통 사람들은 몸이 부서져라 노동하면서도 대부분의 생애를 굶주림 속에서 보냈다. 그러니 ‘노동하지 않고도 배불리 먹는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보다 좋은 표지는 없었다. 뚱뚱한 몸, 햇볕에 그을리지 않은 허여멀건 피부, 못이 박이지 않은 부드러운 손이 귀족의 상징이 됐다. 이런 신체 특징은 후덕·여유·관용 등의 덕목과 연계됐고 깡마른 몸에는 강퍅·조급·비관 등 부정적 이미지가 붙었다. 19세기 말에 소개된 사진도 비만의 긍정적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 신문과 책자·엽서 등에 모습을 드러낸 왕족과 귀족, 부호와 고관대작들은 거의 모두 뚱뚱했다.

 신분제가 폐지된 뒤 우리나라에서도 한동안 뚱뚱한 몸을 가지려는 대중의 욕망이 고조됐다. 비만을 건강이나 정력과 동일시하는 태도가 확산됐고, 뚱뚱한 몸으로 바꿔준다는 약들이 쏟아져 나왔다. 1920년대 들어 유선형이 새로운 신체 표준으로 등장하고 사회주의자들이 비만을 ‘부르주아적 나태와 탐욕’의 소치로 공격함에 따라 그 욕망이 한풀 꺾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꽤 오랫동안 뚱뚱한 몸에는 희소가치가 남아 있었다.

 보릿고개와 더불어 그 희소가치가 사라지기 전까지, 남녀를 차별하기는 했지만 뚱뚱한 몸에도 일부 긍정적 이미지가 남아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장이나 장군 역할은 뚱뚱한 배우가 주로 맡았다. 그러나 굶주리는 사람이 거의 없어지자 갑자기 사정이 달라졌다. 80년대 중반 마른 몸으로 만들어 준다는 약들이 대중을 유혹하기 시작했고 뚱뚱한 배우는 게으르고 어리바리한 역할만 맡았다. 오늘날 비만에 붙은 귀족 이미지는 완전히 사라졌으며, 사람들은 마른 몸을 갖기 위해 굶주림을 마다 않는다. 비만이 건강에 해롭다는 지식에 콧방귀를 뀌던 사람들이 이제는 지식의 권장치를 멀찍이 뛰어넘는 몸을 만들려고 난리다. 세상을 바꾸는 지식은 사람들이 원하는 지식뿐인가.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