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가 있는 아침 ] - '데이지 화분에 얼굴을 묻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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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세상을 빠져나가려는 중이야

쉬잇 내 말을 들어봐

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

다.시.는.돌.아.오.지.않.는.다

다시 돌아와도 찾을 수 없도록

도와줘 데이지, 내 얼굴을 먹어줘

내 의자와 찻잔을, 이름과

구두를 삼키고 동그란 꽃봉오리를

단단히 오므려버려 숱한 풀꽃더미

사이로 숨어버려 새 주소에도

검은 새떼가 그림자를 떨어뜨렸어

포크레인이 앞산을 퍼먹으며

뿌리 없는 나를 향해 다가오고 창문을

열면, 녹슨 모래언덕이 무너질 듯

데이지, 그런데 난 돌아오고

싶을 거야 야수와 포옹할 미녀를 기다리며

끝없이 기나긴 불안의 끄나풀이 되고 말거야

도와줘 데이지. 돌아올 수 없도록

내 생의 사진들을 먹어줘

이상희(1960~), '데이지 화분에 얼굴을 묻고'

세상을 빠져나가기 위해 한 여자가. 세상을 빠져나가면서 또 한 여자가 세월에게 묻는다. 왜 떠나야만 하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제 내가 말해 줄게. 도와줄게. 나를 찾을 수만 있다면. 꽁꽁 묶어둘 수 있다면, 그러고 나를 잊을 수 있다면. 젊은 영혼아 네가 그럴 수만 있다면. 박상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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