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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부터 ‘탈옥’ 꿈꾸는 아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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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젠 아이가 공부를 안 해도 너무 다그치지 말아야겠어.” “맞아! 요즘 세상에 사고를 치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디야.”

 지난 주말, 평소 친분이 있는 다섯 가족이 모여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 또래 자녀를 둔 부모들 사이에서 화제는 최근 벌어진 한 사건으로 집중됐다. 지난 21일 한 중학생이 집에 불을 질러 일가족 4명을 숨지게 한 사건이었다. 열네 살 아이가 벌인 어이없는 범죄는 남의 얘기로 느껴지지 않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이들과의 갈등이 점점 심해진다는 데 부모들은 공감하고 있었다.

 패륜적 범죄를 저지른 이모군은 비행(非行) 청소년이 아니었다. 1학년 때 반장을 했을 정도로 책임감과 리더십도 있다고 했다. 이군의 가정도 결손가정이 아니었다. 부모는 물론 할머니와 고모가 함께 사는 요즘 보기 드문 대가족이었다. 아버지는 매일 승용차로 이군을 학교에 태워다 줄 정도로 관심을 쏟았다. 이군에겐 ‘사이코패스’ 기질도 보이지 않았다는 게 경찰관들의 얘기다. 비록 범행을 계획하고, 은폐를 시도했었지만 참회하는 빛이 역력했다고 한다. 그는 경찰에서 자백을 하면서 많이 울어 담당 경찰관도 함께 눈물을 흘렸을 정도였다.

 그럼 이 평범한 학생이 왜 이런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을까. 아무래도 환경적 측면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이군은 범행 동기로 아버지의 강압을 거론했다. 아버지가 판·검사가 될 것을 강요하며, 말을 듣지 않으면 욕설과 매질을 했다는 것이다. 기성세대가 보면 이군 아버지의 행동은 이해가 된다. 자녀가 잘못하면 꾸짖고, 때로 매를 드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녀가 보다 확실한 직업을 갖길 원하는 것은 아버지로서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기성세대와 약간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그 학생의 행동은 정말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학생의 아버지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녀가 원치 않은 진학을 선택했다고 해서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영화에나 나올 법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중학교 3학년인 김태윤 학생은 자신의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김군은 거의 매일 블로그에 수준 있는 글을 올리는 사려 깊은 학생이다. 그런 김군도 “만약 이군처럼 아버지에게 골프채로 맞았다면 그 같은 범행은 저지르지 않겠지만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조용히 가출했을 것”이라고 했다.

 부모가 자신과 다른 꿈을 강요한다면 아이들은 집을 ‘감옥’으로, 아버지를 ‘간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군처럼 끔찍한 범행까지 생각하지는 않더라도 상당수 아이들은 ‘탈옥’(일탈)을 꿈꿀 것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교육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혹시 성적에만 신경을 쓰는 게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진정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든 가정이든 교육의 초점은 대개 인성보다는 입시에 맞춰져 있다. 부모와 아이들 모두 극한적인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은 부모들 몰래 집으로부터의 ‘탈옥’을 감행할지도 모른다.

정철근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