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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코리안] 전 재산 털어 '노인 쉼터'운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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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 엠마오의 집에 살고 있는 독일 노인들이 마당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오른쪽에서 둘째 서 있는 사람은 간호학교를 졸업한 박윤희씨다. 아래 원 안은 엠마오의 집을 운영하는 박석일(우)·정양후 부부.

독일에 '봉사의 마음'을 심는다. 독일 중부 라인강 유역의 작은 마을 베스트호펜. 주위가 온통 포도나무 밭으로 둘러싸인 주민 3000명의 한적한 이 마을에 한국인 부부가 운영하는 생활공동체가 지역사회의 관심을 끌고 있다.

'엠마오의 집'. 엠마오는 성경에 나오는 예루살렘 가까운 곳의 지명이다. 대지 1400㎡에 자리잡은 이 3층짜리 건물엔 독일인 20명과 한국인 4명이 가족처럼 오순도순 살고 있다. 독일인 20명 중 14명이 70세 이상의 노인이다. 1998년 문을 연 엠마오의 집은 바로 외롭거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주로 모여 생활하는 '공동 생활의 집(Haus f?r Wohngemeinschaft)'이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대가족 생활을 원하는 독일의 20대 젊은이 6명도 함께 산다.

이 엠마오의 집 운영자는 교민인 박석일(56).정양후(51)씨 부부. 73년 지멘스 기술자와 간호사 신분으로 각각 독일 땅을 밟아 77년 백년가약을 맺은 이들에게 동네 독일 할머니들은 따뜻한 정을 베풀었다.

박씨 부부가 전 재산을 털어 엠마오의 집을 세운 것은 바로 이들의 사랑에 보답하려는 취지였다. 특히 자식도 없이 노후를 보내고 있는 독일 노인들의 쓸쓸한 모습은 박씨 부부의 결심을 더욱 굳게 했다.

물론 어려움도 따랐다. 건축자금 마련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독일 이웃들의 도움이 잇따랐다. 마을의 복덕방 주인은 박씨 부부가 자택을 처분해 건축비를 대겠다는 말을 듣고선 매매를 주선하고도 복비를 받지 않았다. 또 은행에서의 대출이 제때 이뤄지지 않아 고민할 때는 마을의 독일인 의사가 선뜻 8만 마르크를 빌려주기도 했다. 정양후씨가 '눈물로 지은 집'이라고 할 만큼 고생이 많았다. 그러나 일단 문을 열자 반응이 뜨거웠다. 박씨 부부의 헌신적인 보살핌이 바로 소문이 난 것이다.

지난해 7월 엠마오의 집에 온 모어 엘스베트(92) 할머니도 "동네 주민들의 입소문을 듣고 찾아왔는데 박씨 부부가 자식처럼 살갑게 보살펴줘 너무 만족한다"며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현재 새로 입주하려는 노인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말한다. 엠마오의 집은 몸이 약한 노인들을 위해 식사와 운동 프로그램은 물론 가벼운 의료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운영은 입주자들이 저마다 내는 약 800유로(약 105만원)의 실비에 주로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형편이 정 어려울 경우엔 능력에 따라 생활비를 덜 낼 수도 있다고 한다. 간호학교를 졸업한 딸 윤희(26)씨, 그리고 아들 등 네 가족이 직접 운영해 경비가 많이 들지 않기 때문이란다. 정씨는 "할머니들의 손발이 돼 뛰다 보면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행복으로 가득 찬다"고 웃었다.

이 박씨 부부에게 한 가지 바람이 있다. 독일 진출 1세 교민들도 부담없이 엠마오의 집을 찾아달라는 것이다.

"60~70년대 한국이 어렵던 시절 20대의 꽃다운 나이로 광원.간호사.기술자 신분으로 독일 땅을 밟은 교민들이 이젠 노년층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번 돈을 대부분 한국의 친지들에게 송금했기 때문에 독일에서 궁핍한 말년을 맞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가 돌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씨의 이야기다.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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