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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노동하며 키운 음악의 꿈, 한국판 폴 포츠의 탄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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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세 살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간 뒤 아버지 모시고 쌍둥이 형과 살았다. 학비가 없어 고교 진학을 포기했다. 아버지는 “공장 다녀서 월 100만원이라도 버는 게 낫지 않겠냐”고 했지만, 그에겐 꿈이 있었다. 환풍기 수리와 공사장 막노동으로 입에 풀칠하면서도 틈틈이 행사장 공연가수로 뛰었다. 크지 않은 키(1m63㎝)에 내세울 것 없는 외모지만, 남들 앞에서 노래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국민이 뽑아준 슈퍼스타로 우뚝 섰다.

23일 새벽 서울 경희대 평화의전당에서 열린 ‘슈퍼스타K 2’ 결승전에서 우승한 허각(25·사진) 얘기다. 허각은 이날 강력한 경쟁자였던 미국 시카고 교포 출신 존박(22)을 따돌리고 상금 2억원을 거머쥐었다. “저한테 노래를 할 수 있게 해준 아버지와 형에게 고맙다. 앞으로 더 가슴으로 다가가는 노래를 하겠다”며 눈시울을 훔쳤다. 인터넷에는 “한국판 ‘폴 포츠’의 탄생이다” “희망과 감동을 준 드라마였다”는 소감이 넘쳤다.

사전 인터넷투표(10%)에서 우위를 보인 허각은 이날 자유곡 ‘사랑비’와 미발표곡(‘언제나’) 대결에서 무대를 압도했다. “노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 사람”(이승철) “간절함 하나는 항상 1등”(윤종신)이라는 심사위원들의 호평이 쏟아졌다. 허각의 ‘언제나’에 이승철과 엄정화가 각각 준 99점은 이번 대회 통틀어 최고점수다. 남은 건 60% 비중의 실시간 문자투표.

고정 팬층이 두터운 존박이 유리할 거란 예상이 있었지만, 화면 왼쪽 상단 문자 콜(call) 수는 주유소 계기판이 바뀌듯 급속히 올라갔다. 준결승 때 70만 콜 기록을 깨고, 130여만 콜이 폭주했다. 그들의 지지는 허각을 향했다. 존박처럼 훈훈한 외모도, 세련된 매너도 갖추지 않았지만, 노래 실력 하나로 정상 문턱까지 다다른 허각이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나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데 너도나도 동참했다.

허각의 대반전은 존박·장재인과 함께 한 준결승(15일) 때 예고됐다. 톱3는 외모·이력·성격만큼 음악 색깔이 대조적이었다. 허각이 타고난 보컬리스트로서 좌중을 휘어잡는 에너지가 강점이라면, 존박은 매력적인 중저음에 세련된 외모와 매너로 여성 팬이 많았다. 홍대 앞 클럽에서 노래하던 장재인은 독특한 음색에 독창적인 곡 해석으로 매니어층을 거느렸다.

‘시청자 지정곡 부르기’ 미션에서 허각은 이적의 ‘하늘을 달리다’를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소화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장재인이나 존박이 결승에 우선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남은 둘 가운데서 ‘비주얼’이 불리한 허각이 떨어질 것이란 전망이었다.
그러나 MC 김성주가 결승 진출자로 먼저 호명한 이는 허각. 집계표가 왔을 때 담당 PD조차 “누구라고요?” 할 정도로 의외의 결과였다. 방송 석 달 동안 차근차근 넓혀온 지지층이 결정적인 순간 표심을 행사했던 것이다.

비록 톱3에서 탈락하긴 했지만 장재인의 선전도 주목거리였다. 심사위원 윤종신은 “비주류 음악을 하는 친구가 이만큼의 성과를 냈다는 것은 대중의 취향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이라며 “우승자보다 가요계에 미친 영향이 더 클 것”이라고 격려했다.
결국 최종 결승전에서 만난 허각과 존박. 두 사람의 첫 대면은 최종예선 격인 ‘슈퍼위크’에서다. 총 134만6402명이 참가한 시즌2에서 ‘슈퍼위크’에 선발된 이는 151명이었다. 허각과 존박은 서로 다른 성장 배경에도 불구하고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를 빌려 둘도 없는 ‘절친’이 됐다. ‘슈퍼위크’ 조별 예선을 협력해 통과했고, 라이벌 미션에서 선의의 경쟁을 벌인 뒤 나란히 톱11에 올랐다.

우승 문턱에서 분루를 삼키긴 했지만 존박도 많은 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 간 그는 동양인이라고 무시당했던 유년 시절을 음악으로 견뎠다. 올 초 ‘아메리칸 아이돌’ 시즌9에서 톱20에 진출하자 한국에서도 응원 메일이 쏟아졌다. 존박은 이를 통해 ‘슈퍼스타K’의 존재를 알게 됐고, LA 지역예선에 참가함으로써 모국 무대에 서게 된 것이다. 그의 톱2 진출은 시카고 지역신문에 실렸고, 국내에도 이미 다수의 팬클럽이 생겨났다.

허각은 우승이 확정되자 “옆에 있는, 노래 잘하는 친구(존박)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존박 또한 “각이 형이 될 줄 알았다”며 ‘아름다운 패자’의 모습을 보여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허각은 우승상금 2억원을 어디에 쓸 것이냐는 질문에는 “아버지와 형과 함께 살 집을 장만할 것”이라고 답했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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