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다시 떠오른 '한·일 과거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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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은 과거의 진실을 규명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배상할 일은 배상해야 한다"고 발언한 것은 한.일 관계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과거사 문제를 해결해 한.일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일본 총리와 언론의 반응은 개탄스러운 것이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한국이 "국내사정이 있을 것"이라며 노 대통령의 발언을 '국내정치용'으로 호도했다. 일본 언론들도 독도 문제 등으로 한국 국민감정이 격앙된 것을 감안한 정치적 발언이라고 의미를 깎아내렸다.

일본이 이렇게 성의없는 태도로 일관한다면 한.일 양국 간 외교적 마찰은 피하기 힘들 것이다. 우리 국회 문광위는 '한.일 우정의 해 문화교류 행사' 재검토 촉구결의안을 채택했다. 일본 집권 자민당 의원단도 북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방한하려던 일정을 연기했다.

노 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지난 1월 한.일 협정 문서 공개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한.일 과거사 문제를 정면 돌파하기로 한 정부의 의지를 노 대통령이 직접 재천명한 것이다.

노 대통령의 발언에서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은 일본의 '배상'에 대한 발언이다. 노 대통령은 배상 문제에 대해 한국의 책임도 언급하였지만,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의 배상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앞으로 한.일 관계는 또다시 과거사 문제에 휩싸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노 대통령의 "배상할 것은 배상해야 한다"는 발언은 일제하 한국인 피해자에 대한 배상 문제가 1965년 한.일 협정으로 마무리됐다는 일본의 입장을 반박한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의 언급에는 청구권 협상 때 제기되지 않았던 일본군 위안부, 원폭 피해자, 징용 사할린 동포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 측이 최소한 개인 차원의 배상 요구에 응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동안 일본은 과거사 문제의 해결에 소극적인 것은 물론 역사 왜곡 교과서를 펴내고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발언을 되풀이했다. 그런데다 군사대국화를 추구하고 평화헌법까지 개정하겠다고 나섰다.

노 대통령의 발언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정면돌파 입장을 분명히 한 것 외에도, 최근 자꾸 불거지는 독도 문제에 대한 효과적 대응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올해 '한.일 우정의 해'를 맞았지만 일본 시마네현 의회의 '독도의 날' 제정 조례안 제출에 이어 다카노 도시유키 주한 일본대사의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발언도 있어 3.1절에 즈음해 정부의 방향제시가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한.일 양국은 앞으로 미래지향적 관계를 위해 외교적 차원에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양국 모두 민족감정을 자극하려는 쪽으로 과거사 문제를 풀어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고이즈미 총리가 노 대통령의 발언을 국내정치용이라고 호도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번 일에 두 나라 정부가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한.일 관계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우려가 있다. 앞으로 동북아 평화를 위해 긴밀한 북핵 공조가 필요한 상황에서 양측의 지혜로운 대처가 있어야 한다.

일본은 과거 독일이 그랬듯, 진실한 자기반성의 토대 위에서 진실규명과 사과.배상 등을 통해 상처를 아물게 함으로써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는 전 세계가 하고 있는 과거사 청산의 보편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국가 간 협상에서는 새로운 사실이 나타나거나 필요하다고 인정될 경우 추가협상을 할 수 있다. 한.일 협정은 당시 군위안부 문제는 거론조차 안 됐고, 그 이후 나타난 것에 대해서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한.일 양국은 새로운 동북아시대를 맞이해 신중하게 추가협상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유병용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