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issue &] 해외 건설시장은 신뢰 먹고 자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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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경세제민(經世濟民·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함). 1970~80년대 개발시대 청년에게 얼마나 매력적인 단어였던가. 그것은 내가 경제학을 전공으로 택한 동기였으며 당시 강한 성장 비전을 주던 대우에 입사하는 직접적 계기가 됐다.

 2년여 수련을 거쳐 79년 당시 미수교국인 리비아의 벵가지시 가리우니스의과대학 건설 현장에 부임한 나의 첫 해외생활은 기대와 설렘으로 시작됐다. 대우가 수주한 첫 공사라 해서 DC-1(DAEWOO Contract-1)으로 부르던 이 프로젝트는 연인원 50만 명이 투입됐다. 그러면서 리비아 진출의 터전이자 한국 건설 업체들의 아프리카 전진기지 중 한 곳이라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건설은 사람이 큰 자산이라지만 당시로서는 직원들의 투지와 열정만 있을 뿐 인력·기술, 그리고 시스템까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게 없었다. 오죽하면 가설 사무실 벽에 궁즉통(窮則通·궁하면 통한다)이라고 써붙여 놨겠는가.

 혹독한 시련은 있어도 이겨내지 못할 역경이나 실패는 없던 시절이었다. 좌절을 모르는 도전과 열정이 지금 한국 건설의 글로벌 경쟁력을 키워온 것이나 다름없다.

 사하라 남단 사막 한복판에 건설 중이던 비행장 건설현장에 리비아의 최고지도자가 불쑥 찾아와 2주간 머물며 현장근로자들과 같이 탁구도 치며 우리 근로자들을 격려했다. 이는 80년 우리나라와 정식 수교를 맺는 계기가 됐다. 민간 기업의 활동이 국가 간 수교의 물꼬를 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최근 들어 해외건설 시장에서 강국 반열에 올라선 것은 집념의 결정체다. 초기 파이어니어들의 공통점은 국위선양과 후대를 위한다는 사명감 두 가지였다. 쌓기는 어려워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인 글로벌 비즈니스 세계에서 긴 세월 공을 들인 노력이 그 안에 숨어 있으며 앞으로도 이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리비아 건설시장만 하더라도 78년 진출 이래 지금까지 33년을 하루같이 믿음과 신뢰, 설득과 이해의 노력 속에서 관계를 다져왔다. 건설업은 국적을 불문하고 인간의 실생활과 매우 가깝게 밀착돼 있어 글로벌 시장성이 무궁무진하다.

 이런 시장에서 민간과 정부는 늘 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한 덩어리로 합쳐야 한다. 이는 국제 입찰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요체이기도 하다. 최근 건설업계뿐 아니라 우리나라 재계에 많은 우려를 주었던 리비아와의 외교 문제 해결도 이 점에서 다를 바 없다. 외교가의 예상과 달리 문제 발생 4개월여 만에 양국 관계가 정상화된 데는 국민의 염려와 정치권·경제계의 많은 노력이 뒤따랐다. 여기에다 지난 30여 년간 업체들이 쌓아온 신뢰가 뒷받침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지난달 말 리비아 최고지도자와의 면담에서 우리 측은 “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는 한국 속담을 꺼낸 뒤 “이번 일을 계기로 한-리비아 관계가 더욱 친밀하고, 공고해질 것으로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지도자 카다피는 환한 웃음과 함께 가슴에 손을 얹어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그동안 현지에 진출한 업체들이 닦아놓은 신뢰가 없었다면 과연 가능했던 일이었겠는가.

 필자는 요즘도 1년 중 두 달은 해외현장에 나가 직원들과 부대끼며 지낸다. 직원들과 호흡하면서 어디에서 무엇이 남고 모자라는지 챙기기 위함이다. 사람과 조직, 그리고 문화는 기업경영의 모든 것이다. 원자력을 비롯해 석유·가스, 신도시 개발, 사회기간시설 건설 등 해외 건설시장은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충분한 경험과 인력·시스템·기술력의 뒷받침 없이는 결코 호락호락한 시장이 아니라는 것도 절감하고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현지에서 다지고 쌓아야 하는 신뢰 관계다. 이번 리비아 사태에서도 절감했듯 이는 시장을 개척하고 오랫동안 유지하는 중요한 도구가 아닐 수 없다.

서종욱 대우건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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