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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의 영웅 '이모티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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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영화 속에는 늘 히어로(hero.영웅)가 있다. 대단한 영웅이 아니라 늘 자신이 처한 상황을 뚫고 나올 능동성과 주체성을 지닌 주인공들이 모두 히어로인 것이다. 무언가 모자라고 삐뚤어졌어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헤치고 나오는 동안 영화는 저 밑바탕에 숨어있던 그들의 영웅적 성격을 발견해내는 것이다. 뭐 영화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인터넷이 빠르게 보급되면서 이 인터넷 속에서도 비슷한 히어로를 만나는 것 같아서 하는 얘기다.

그 중 ^.^, ^0^, --++, ㅠ. ㅠ, -_-, 등의 이모티콘(emoticon)이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인터넷 채팅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미묘한 감정을 나타내기 위해서나 빠르게 진행되는 채팅의 특성상 좀 더 빠르고 간결하게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이모티콘은 emotion(감정) + icon(상) 의 합성어로 인터넷과 휴대전화 등에서 사용되는 일종의 그림문자다. 불특정한 창조자에 의해 생겨났으며, 더 다양하고 창조적인 시도들이 컴퓨터 모니터 위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emotion icon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는 이모티콘. 결국은 전체 인터넷뿐 아니라 휴대전화 등에까지 영향을 미쳐 이모티콘이 아예 제품 안에 내장되기에 이르렀고, 사용자의 필요에 의해, 또 사용자 스스로의 힘으로 현재의 상태로 발전해 왔다.

혹자들은 대화가 차단되고 개인주의가 확산되는 등 사람 사이의 관계 단절을 우려하기도 했지만 네티즌들은 인터넷에서 새로운 언어로 소통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구축하고 자기를 표현해 내는 데 별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도리어 다양한 동기와 욕구를 바탕으로 여러 층으로 이합집산된 그들의 모임은 이전에는 절대 만날 수 없던, 접할 수 없던 사람과 문화를 포괄하여 새로운 문화를 생산해내는 파워를 보이고 있다.

몇년 전 인터넷 소설의 연이은 출간으로 이모티콘의 사용에 여러 논란이 있기도 했다. 무분별한 이모티콘의 사용은 현재의 언어체계를 혼란시키고 무너뜨릴 수 있다는 논지였다. 물론 그 당시 논의에는 이모티콘과 함께 인터넷에서 떠오른 '외계어'까지 포함한 것이었으며 정말 무슨 암호 같은 외계어는 더 이상 한글이 아닌 듯 보였다. 그러나 몇년 후 같은 우려의 대상이었던 이모티콘과 외계어는 그 발전 양상을 달리하고 있다. 이모티콘은 일각에서 무분별한 사용을 스스로 제지하며 어느 정도 체계가 생기기도 했으며, 사용의 유효성으로 그 사용자와 창조자가 더욱 많이 생겨난 반면, 외계어는 우려를 더할 정도로 확산되지 않은 채 소수의 사람만이 사용하고 있다. 또한 네티즌들은 이모티콘을 감정표현 수단으로만 사용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이것을 이용해 새로운 미술작품을 만들었다. 물감과 붓이 아니라 컴퓨터 자판만을 이용해 그들은 모니터 위에 꽃도 그리고 사람의 초상화도 그린다. 지난해에는 이모티콘으로 그린 미술작품의 전시회도 열렸다고 한다.

인터넷과 새로운 패러다임의 급속한 확산이 불러올 폐해와 영향력을 우려한 사람들은 인간이 지닌 능동성과 주체성을 간과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네티즌들은 새로운 언어와 방식으로 자기표현 욕구를 실현해 내며 인터넷과 휴대전화 등을 단순한 기계를 넘어선 새로운 소통의 장으로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주어진 틀 안에서 수동적으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과 방식으로 계속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그들, 그들을 개개인으로 보면 단점투성이 일개인일 수 있겠지만, 네티즌이란 이름의 그들은 능동성과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꾸려가는 당당한 히어로들이 아닐까.

김상진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