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인생은 언제나 속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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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승훈(1942~), '인생은 언제나 속였다'

인생은 언제나 그를 속였다 그가 다가가면 발로 차고

그가 도망가면 팔을 잡았다 그가 웃으면 울고 그가 울면

웃었다 그가 망하면 웃고 그가 팔을 쳐들면 웃고 그가

걸어가면 웃고 너를 안을 때뿐이다 인생이 그를 속이지

않은 건 너를 안을 때 해가 질 때 너의 눈을 볼 때

너와 차를 마실 때 그러나 너와 헤어지면 인생은 그를

속였다 추운 골목을 돌아가면 골목의 상점에서 담배를

사면 가로등에 불이 켜지면 인생은 속였다 밤이 오면

아파트 계단을 오르면 작은 방에서 잠을 이룰 수 없으면

밖에 바람이 불면 바람 속에 돌아누우면 잠이 안 와

문득 일어나면 새벽 두 시 캄캄한 무덤에 불을 켜면 무덤

속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 책 상 위 전기 스탠드를 켜면

위통이 찾아오면 다시 불을 끄면 캄캄한 무덤 속에 누워

있으면 책상 위의 냉수를 마시면 책상 위의 사과를 먹으면

아아 <나>를 먹으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으면 문득 머언

무적이 울면 새벽 연필을 깎으면 이마에 술기운이 남아

있으면 다시 잠이 안 오면 문득 무섭다는 느낌이 들면

턱을 고이면 떨리는 손으로 일기를 쓰면 돌덩어리

우울 황폐한 새벽 인생은 그를 속였다 인생은 언제나 그를

속였다 그를 속이고 그를 감시하는 이 인생이라는 놈!



그는 오늘 아침에도 같은 시각에 눈을 뜬다. 어제와 같은 가방을 들고 어제와 같은 길을 떠난다. 어제와 같은 의자에 앉아 어제와 같은 하루를 시작한다. 어제 아침에 그의 인생은 파리 행 비행기에 올랐고 우중충한 그곳에서 화려한 저녁을 보냈다. 그저께 그들은 새로운 내일을 함께 설계하였고, 인생은 언제나 그와 함께 있지만, 그는 일찍 일어나 가방을 들고, 그의 인생은 아직도 꿈속에 있다.

박상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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