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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청거리는 학교] 下. 대학 지상주의의 부메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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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교수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시험 문제를 유출한 서강대 입시 부정 사건을 보고 '그 교수처럼 못한 게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송인섭 숙명여대 교수)

"많은 학부모가 검사 아들의 성적 조작 사건을 놓고 '남편이 검사인데 아들이 공부를 못하면 나라도 그렇게 하겠다'고 말한다."(서울 강동구 학부모 심은교씨)

촌지를 주며 성적 관리를 부탁하는 학부모, 돈받고 성적 조작을 지시한 교장, 답안지를 바꿔치기한 교사, 자식에게 입시 문제를 미리 가르쳐준 대학교수…. 이들의 일그러진 모습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학벌 지상주의의 산물이다. 국민 10명 중 6명이 '학벌이 우리 사회에서 성공.출세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한국직업능력개발원 2003년 조사)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다. 국정홍보처 조사(2003년)에 따르면 국민 대부분이 '출신 학교에 대한 차별이 심각하다(87.7%)'고 생각하고 있고 '차별을 경험했다'는 사람도 3명 중 1명이나 된다.

전문가들은 "성적 관련 각종 비리는 개인의 범죄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각종 모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며 "근본적인 진단과 처방이 없는 한 제2, 제3의 문일고.배재고.서강대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 학벌주의 사회의 그림자=지난달 5일 부산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우등생 딸을 둔 어머니 김모(45)씨가 분신자살했다. 재수한 딸이 수능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도 명문대 진학에 실패한 것을 비관해 저지른 일이었다. 일부 고교의 학부모와 교사가 '부적절한 관계'로까지 발전한 것도 '대학' 간판에 대한 집착과 무관치 않은 일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백순근(교육학) 서울대 교수는 "일단 일류 대학에 붙기만 하면 인생의 성공이 보장되는 우리 사회에서는 편법.불법을 저질러서라도 일류대에 가고픈 유혹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불거진 일련의 성적 부정 사건도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학벌주의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은 학벌사회다. 학교에 가는 가장 큰 이유도 학벌.자격을 따기 위해서다. 대학졸업자 평가에서는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가장 중시된다. 학벌로 인해 하는 일과 수입에서 너무 큰 차이가 벌어지는 게 가장 큰 사회 문제다."

일본 내각부가 2003년 한국.일본.미국.독일.스웨덴 등 5개국에서 각각 18~24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면접조사해 발표한 '세계 청년 의식조사' 결과의 일부다. 학교에 가는 가장 큰 이유로 일본은 '친구 사귀기', 미국.독일은 '일반적인 기초지식 습득', 스웨덴은 '재능 신장'을 각각 가장 많이 꼽았다. 사회가 대학졸업자를 평가하는 주요 잣대로는 한국이 '일류대학', 일본은 '전공', 스웨덴.독일은 '대학 성적', 미국은 '어떤 대학의 어떤 전공'을 가장 중시했다. 한국의 학벌주의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조사 결과다.

◆ 인식의 큰 틀이 바뀌어야=전문가들은 일벌백계식의 처벌과 감시 시스템 구축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근본적인 사회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강태중(교육학) 중앙대 교수는 "성매매금지법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행위가 사회적 해악을 가져온다는 인식이 사회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라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성적 부정 등이 어떤 사회적 해악을 가져오는지에 대해 학교와 사회에서 끊임없이 교육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대봉 고려대 교육대학원장은 "(학생들에게) 공정한 게임의 법칙을 지켜나가는 민주시민으로서의 기본자질을 길러줘야 한다"면서 "일회성 캠페인에 그칠 것이 아니라 유치원.초등학교 때부터 '민주시민 의식 교육'을 교과목으로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간판보다 실력이 인정받는 사회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백순근 교수는 "대학에 입학한 뒤에도 지속적인 학생의 질 관리를 통해 부적격자를 퇴출시켜야 한다"며 "정말 실력있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면 일회성 편법이 통하지 않는 사회적 풍토가 조성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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