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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87) 장제스, 소련 코민테른 간부와 아들 교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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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시절 중기계창 동료들과 야유회를 나온 장징궈(앞줄 좌6)와 부인 파이나(앞줄 좌5). 파이나는 중국에 온 뒤 시어머니로부터 장팡량(蔣方良)이라는 중국 이름을 받았다. 장의 오른쪽에 있는 모자 쓴 여인은 반세기가 지난 뒤 “니콜라의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흘렀다. 우리는 그가 남을 원망하거나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며 장징궈를 회상했다. 김명호 제공

1927년 4월 12일 상하이에서 청당(淸黨)의 서막을 연 장제스는 혁명 근거지 광저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쑤(江蘇)·저장(浙江)·후난(湖南)·장시(江西)·푸젠(福建)·광시(廣西)·쓰촨(四川) 지역의 중공당원들을 닥치는 대로 색출했다. 형장이 따로 없었다. 대로·골목 할 것 없이 유혈이 낭자했다.

3년간 계속된 1차 국공합작은 피비린내만 남긴 채 공염불로 끝났다. 목숨을 건진 중공당원들은 두더지 신세로 전락했다. 장제스는 소련인 고문 140여 명을 추방해 중·소 관계도 완전히 파열시켜 버렸다.

국공합작의 옥동자였던 중산대학의 중국인 학생들은 본국의 정변 소식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소련은 학생들 중에서 국민당원들은 중국으로 돌려보냈다. 항상 중공 편에 섰던 장징궈는 소련을 떠나지 않았다. 스스로 잔류를 희망했는지, 후일 장제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스탈린이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럴듯한 이유로 “한방에서 살다시피 했던 군벌 펑위샹(馮玉祥)의 딸 펑푸넝(馮弗能)과 중산대학 여학생 중 가장 예뻤던 장시위안(張錫媛)이 바람둥이 쭤취안(左權·후일의 팔로군 전방총부 참모장)과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소련에 눌러앉았다”고 말하는 중국 할머니들이 많다. 당시 장징궈는 17세 소년이었다.

1년 후 장시위안은 덩샤오핑(鄧小平)과 간소한 결혼식을 올렸다. 펑푸넝은 “사람들은 청년단원인 네가 놀기 좋아하는 나와 가깝게 지내는 것을 싫어한다. 나는 너의 친구나 동지가 될 자격이 없다. 그간 축낸 러시아 빵과 네게 미안하다. 아버지와는 화해하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귀국해 버렸다.

장징궈도 귀국을 요청했지만 코민테른은 가타부타 확답을 주지 않았다. 어쩌면 인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소련 홍군에 자원 입대했다. 어려서부터 호된 교육을 받았고 시련이 몸에 배다 보니 힘들어도 낯을 찡그리거나 한숨을 쉬는 법이 없었다. 항상 명랑하고 적응력이 뛰어났다. 2년 후 사단 최우수 사병에 뽑혔다.

소련 정부는 관례대로 장징궈를 레닌그라드 소재 중앙군사정치학교에 입학시켰다. 이제 그의 이름은 ‘니콜라’, 유일한 지도자는 “스탈린 동지”였다. 정치공작이 뭔지를 제대로 배우며 머리에서 발끝까지 붉은 물이 들기 시작했다. 유격전술과 무장전복에 관한 논문은 소련인 교관들을 감탄시켰다. 이때 장의 나이 20세, 장차 중공의 지도자 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군정학교를 마친 장징궈는 발전소에서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손에는 물집이 생기고 온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매달 45루블을 받았다. 빵은 배급제였지만 하루에 두 끼밖에 못 먹는 날이 많았다. 항상 배가 고팠다.” 장은 운명을 개선할 방법을 찾았다. 야간학교에 들어가 토목공정학을 배웠다. 중국과는 모든 연락이 단절된 지 오래였다.

1931년 6월 15일 국민당 정보기관은 코민테른 극동 지역 책임자 뉘란 부부를 체포했다. 6개월 후 소련은 쑹칭링(宋慶齡)을 통해 장징궈와 교환할 것을 제시했다. 장제스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12월 16일 일기에 “어린 자식이 황무지에 내팽개쳐지고, 소련인들에게 잔혹한 죽음을 당할지언정 국가에 해를 끼친 범죄자들과 교환하지 않겠다. 후손이 끊기고 나라가 망한다 해도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운명인 줄 알고 받아들이겠다”고 적었다. 훗날 장제스의 부관은 “그날 밤 태연히 잠자리에 든 총통은 두 차례 대성통곡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장징궈는 농촌으로 쫓겨났다. 농민들은 “먹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중국인이 굴러 들어왔다”며 조소했다. 땅이나 갈아엎으라며 말과 농기구를 던져 줬다. 장은 온종일 밭을 일궜다. 하루에 4시간밖에 자지 않았다. 결국 병으로 쓰러졌다. 고향의 기름진 농토가 그리웠다. 몇 개월이 지나자 농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마을 사람들은 장징궈를 행정위원회 부주석으로 추대했다.

2년이 흘렀다. 소련은 장징궈를 한곳에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번에는 공장 중의 공장이라고 불리던 시베리아의 우라마시 중기계창으로 보냈다. 이곳에서도 성실하고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뭐든지 시키면 다 해냈다. 부공장장으로 승진했고 중공업일보의 주편도 겸했다.

장징궈는 이웃 공장에 근무하는 러시아 여인을 만나 가정도 꾸렸다. 이 미래의 대만총통은 아들이 태어나자 소련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소련공산당에 입당원서와 장제스를 독하게 비난하는 입당이유서를 제출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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