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의 향기

은사의 가르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7면

이제 가을의 안쪽을 거닐고 있는 느낌이다. 소로(小路)처럼 사방이 고요한 때가 빈번해졌다. 그런 소로에 머리를 수굿한 채 걸어도 좋고, 바위처럼 근중하게 앉아 있어도 좋다. 한 사찰의 주련에서 얻어온 문장을 나는 요즘 틈이 날 때마다 읽고 있다. “하늘과 땅이 생겨나는 것보다 앞서 한 물건이 있었느니라. 형태도 없고 본디 적요하여 네 철 변화를 좇지 않으니 시듦이 없고, 능히 만상(萬像)의 으뜸이 될 만하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흘러와서 움직이고 사라져가는 것들 속에서 가고 오는 것이 없는 부동(不動)의 한 물건을 찾기도 한다. 멀리서 와서 멀리로 가는 것이 많은 까닭이다. 여름 매미는 갔고 가을 귀뚜라미는 왔으며, 우레는 갔고 찬 이슬은 왔다. 모두 맨살 위에 시간을 걸치고 배회하는 가련한 것들 아닌가. 이런 연유로 감각기관을 잘 단속하기 어렵고, 마음에 이는 거센 물살을 잠재우기 어렵다.

 얼마 전 모교에 강연하러 갔다가 내 고등학교 시절 국어 과목을 가르쳤던 스승을 만나 뵙게 되었다. 물론 이제는 정년퇴직을 하셨다. 한학에 달통한 분이어서 나의 스승은 수업시간에는 늘 한문 문장을 통째로 줄줄 외우셨다. 나는 선생님께서 칠판에 쓰신 그 문장들을 늘 베껴 썼는데, 학동(學童)이 되어 글을 배우는 기분이 썩 좋았다. 대학에 가서 문학을 하겠노라고 내가 미리 작정을 하게 된 것도 선생님의 수업을 들은 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 강연을 마치고 선생님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다. 아랫사람에게 말을 낮추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식사를 하면서 몇 차례 겸손하게 사양하시는 것이 예전과 다르지 않으셨다.

 식사 끝에 한 문장을 들려주셨는데 ‘중화(中和)’를 언급하는 문장이었다. “희로애락이 생겨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 하고, 나타나되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 중화(中和)에 이르면 천지(天地)가 제자리를 찾고, 만물이 제 모습으로 자라게 된다.” 『중용』의 가르침이었다. 서울로 돌아오면서 나는 선생님께서 헤어지기 직전에 들려주신 이 가르침을 속으로 몇 차례 되물어보았다. 세상에 나가 여러 사람과 어울려 사는 제자를 위해 들려주신 말씀이었다. 말씀을 되짚으니 목전에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주 대한 듯했다.

 선생님의 말씀을 거듭 생각하다 김사인 시인의 시 ‘조용한 일’이 떠올랐다.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 철 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 고맙다 /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중화’의 가르침은 실은 이런 시 속에도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여러 사람과 어울려 사는 세상이니 사람을 번갈아 만나는 일이 만만치 않다. 내 뜻이 오해를 얻기도 한다. 곧바로 바로잡으려 해도 그러한 때를 얻기 쉽지 않다. 그러하니 매사에 과불급(過不及)이 없게 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가을이 깊어가니 혼자서 하는 생각도 많아진다. 그러나 생각하고 또 생각한 후에 이르게 되는 그 끝자리는 텅 비어 소란스럽지 않다. 시듦이 없는 적요한 성품을 이즈음에 찾고 있으니 가을은 가을인 모양이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