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새 짐승 그린 옛그림, 600년 동안 어떻게 진화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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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겸재 정선 ‘추일한묘’, 비단에 채색, 20.8×30.5㎝ [간송미술관 제공]

여기 가을 고양이 두 마리가 있다. 검은 털빛이 반지르르 통통하고 금빛 눈매가 초롱 같다. 조선조 화가들인 겸재 정선(1676~1759)의 ‘추일한묘(秋日閑猫)’와 현재 심사정(1707~69)의 ‘패초추묘(敗蕉秋猫)’다. 같은 고양이를 그렸는데도 자세히 뜯어보면 다르게 생겼다.

겸재의 ‘가을날 한가로운 고양이’는 터럭 하나하나가 선명할 지경으로 세심한 관찰력과 적확한 묘사가 돋보인다. 우리 산수를 우리 눈이 본 대로 그려냈던 진경산수의 창시자인 겸재는 중국 그림본을 그대로 베껴서 그리던 조선 전기의 화풍을 일신했다. 이에 비하면 현재의 ‘찢어진 파초와 가을 고양이’는 다시 중국 그림틀에 기대려는 반전을 보여준다. 겸재를 스승으로 모셨던 현재는 제자로서 사생기법의 계승과 아울러 변주를 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그는 중국 남종화를 수용해 조선남종화를 창안한다. 조선조 500년 회화사는 이처럼 각 시대에 뿌리내렸던 이념을 양분 삼아 꽃피었다.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가을 기획전으로 마련한 ‘화훼영모대전(花卉翎毛大展)’은 이 흐름을 꽃과 새와 동물 그림 100점으로 살펴본다. 실물이 남아있는 화조화의 효시라 할 고려 공민왕(1330~74)부터 조선 말 김은호(1892~1979)까지 약 600년에 걸친 시대정신과 기법의 변화를 한자리에서 비교해볼 수 있다.

현재 심사정 ‘패초추묘’, 비단에 담채, 18.5×23㎝. 겸재는 정밀한 사생기법으로 조선 고양이를 그려냈고, 현재는 조선남종화풍으로 상상 속 고양이를 창조했다. [간송미술관 제공]

중국의 주자성리학을 도입해 이를 따르던 조선 전기를 살던 화가들은 이 땅에서는 볼 수 없던 중국 물소와 양을 상상해서 그렸다. 이경윤·영윤 형제가 그린 소 그림들에 나타난 남중국의 물소들은 생뚱맞아 보이지만 이념 속에서는 그럴 듯한 동물이다. 퇴계와 율곡이 조선성리학을 이루어내자 이를 바탕으로 우리 시각을 갖춘 사대부 화가들이 우리 주변의 새와 꽃과 짐승을 사생하기 시작했다. 조속(1595~1668)의 까치, 윤두서(1668~1715)의 말, 변상벽(1730~?)의 고양이는 한 눈에 우리 토종임을 알아볼 수 있다.

정밀하고 생기 넘치는 진경산수화풍의 화조화가 절정을 이룬 것은 단원 김홍도(1745~1806?)에 이르러서다. ‘그림에 취한 선비’란 자호답게 꽃이면 꽃, 동물이면 동물, 뭣하나 빠지는 것 없이 차고 넘친다. 이후 추사 김정희(1754~1856)에 의해 받아들여진 청조고증학은 청조문인화풍의 생략기법으로 조선 화훼영모화를 이끌어갔고, 여기에 조선 말기의 노쇠현상이 맞물리면서 그림들은 묘사력과 발랄함을 모두 잃고 만다. 장승업(1843~97)과 이도영(1884~1933) 등이 중인 계층의 취향에 맞춘 장식화를 생산하는데 머물면서 조선조의 화조화 계보는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전시를 준비한 최완수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은 “600년에 걸친 반복기멸의 문화현상을 이번 화훼영모대전에서 한눈으로 확인한 뒤 조선 전기와 비슷하게 미국화된 지금 우리의 화단 현실을 돌아보고 장차 새로운 이념이 일어났을 때 뭘 한 것인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17~31일 2주간, 무료. 02-762-0442.

정재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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