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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경성대학 교수회, 해방 뒤 첫 입시에서 국어를 빼기로 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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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946년 7월 3일 경성대학 법문학부 제1회 졸업 기념 사진. 앞줄 한가운데가 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이며, 그 좌우에 선 이가 조윤제 법문학부장과 안스테드 총장이다. 일제 말기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너나없이 한국어보다 일본어를 훨씬 잘했다. 자국어를 잘 못해도 흉이 되지 않는 한국 엘리트 문화의 연원은 무척이나 깊다. [사진=서울대학교 법과대학 100년사]

1946년 6월 17일 해방 뒤 처음으로 치르게 된 입학 시험을 앞두고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회에서 입시 과목 문제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그 전에 열린 교수회가 국어와 한문 과목을 제외하기로 결의했는데도 외부에는 국어 시험이 포함된 것으로 발표되자 교수들이 한목소리로 학장의 독단적 처사를 성토했다. 국문학자인 조윤제 학장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그 길로 총장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미국인 총장 안스테드(Harry B Anstead)는 사표를 수리하는 대신 교수들을 일일이 총장실로 불러 “자국어 시험을 치르지 않고 학생을 뽑는 대학이 세상 어디에 있느냐”고 훈계했다.

교수들이라고 국어 과목의 중요성을 모르지는 않았다. 국내에 하나뿐인 대학의 입시 과목과 출제 유형이 중등 교육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국어 시험을 치르자니 국어를 제대로 배운 응시생이 없었다. ‘조선어’는 1938년에 선택 과목이 됐고, 43년에는 아예 폐지됐다. 해방 뒤 일본어를 가르치던 ‘국어’ 시간이 한국어 시간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교과서도 없었고 교사도 부족했다. 국어를 배우고자 해도 배울 수 없었던 학생들에게 국어 시험을 치르라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곧 논쟁을 지속할 이유가 사라졌다. 다음 달인 7월 군정청 문교부는 경성대학과 여러 관립 전문학교를 통합해 하나의 국립대학으로 만든다는 안을 내놓았고, 8월 22일에는 ‘국립서울대학교 설치령’이 공포됐다. 서울대학교로 통합된 학교들은 46년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았고 당연히 입학시험도 없었다.

그러나 사립 전문학교들은 입학시험을 치렀다. 이들 학교에서도 국어 시험의 수준을 정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다음 글을 해석하라. (1)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역(萬里邊域)에 일장검(一長劍) 잡고 서서 긴 바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2)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당시 사립 명문이던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국어 입시 문제다. 지금의 고등학생들에게 이 문제를 보여주면, 모두 한문 문제라 할 것이다.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었던 우리말과 글을 되찾은 지 이제 반세기가 조금 넘었는데, 올해부터 특목고들이 국어 성적을 보지 않고 학생을 뽑기로 했다. 특목고 열풍으로 인한 폐단보다 국어를 잘 몰라도 ‘엘리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확산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바로잡습니다

‘서울대학교로 통합된 학교들은 1946년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았고 입학시험도 없었다’는 내용은 사실과 다르기에 바로잡습니다. 경성대학과 관립 전문학교들은 이 해에도 입학시험을 치러 신입생을 선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