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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중앙시평

세계를 향한 발걸음, ‘척척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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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물론 인수위원회의 구성은 수상해 보인다. 김정은의 사람이라 불릴 만한 젊은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다. 아직은 세자 책봉을 받은 단계일 뿐이므로. 그래서 부왕의 충신들이 전면에 포진할 수밖에 없다. 부왕(父王)으로서는 아들에게 무사히 왕위를 넘겨주는 것 못지않게 자신의 시대를 온전히 정리하는 것이 중요한 탓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세자에게도 충성할 사람들임은 분명하다. 부왕과 세자 모두를 충실히 섬길 사람이라야 권력 심층부에 남아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마치 김경희와 장성택이 김정일에겐 피를 나눈 동생과 매부(妹夫)이지만, 김정은에게도 고모와 고모부라는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듯이.

그래서 살아있는 부왕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정식으로 명칭을 내걸진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총비서직·국방위원장직·총사령관직 인수위원회’가 본격적 활동에 착수한 것이다. 김정은은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직책을 받았지만 핵심 4인방과 공동 인수위원장을 맡은 셈이고, 캠프에서 활약하던 김정은의 젊은 측근들은 아직은 명성 쟁쟁한 인수위원들의 밑에서 실무 책임을 맡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김정은의 독자적 행보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당분간은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세력 기반을 착실히 다질 것이다. 이미 권력이 넘어오기 시작한 마당에 무리할 이유가 없다. 자칫하면 부왕의 노여움, 원로들의 반발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래서 김정은은 일단 2012년까지는 아버지를 도와 경제 살리기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2012년은 김정일이 약속한 강성대국 완성의 해다. 북한 논리에 따르면 강성대국은 경제강국으로 완결된다. 따라서 김정일은 향후 2년간 경제에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시대를 화려하게 마감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강성대국을 건설한 위대한 지도자 동지’로 그는 기억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김정일은 이미 신년사에서 인민생활 향상을 최대의 화두로 내걸었고, 이례적으로 경공업과 농업을 최우선순위로 제시했다. 올해 현지지도도 경제분야에 집중하고 있다. 결국 아버지의 마지막 꿈 실현에 기여해야 김정은의 위상은 더욱 확고해질 것이다.

김정은 개인적으로도 경제 살리기에 나서야 할 충분한 유인이 있다. 그는 아버지만큼 차곡차곡 쌓아온 경력이 없다. 주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저 ‘애송이’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야 한다. 후계자로 지명은 되었지만,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다. 그야말로 뭔가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가장 확실한 지지는 주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변화에서 올 것이고, 그러기에는 경제가 최우선이어야 한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경제의 근본적 회생은 북한체제가 새롭게 변모되어야만 가능한 탓이다. ‘사회주의’ 강성대국을 만들어야 하는 말년의 김정일이나 이제 세자에 불과한 김정은이 당장 변혁을 추구할 가능성은 없다. 결국 부자(父子)의 공동 정권, 과도기의 인수위원회는 자체의 변화는 도외시한 채 외부로부터 최대한의 지원과 협력을 끌어내는 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중국에 기대는 경향은 커질 것이고, 남한을 향한 유화 제스처는 강화될 것이다. 6자회담 재개에도 긍정적 시그널을 계속 보낼 것이다. 일단은 그렇게 2012년을 대비할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렇게 버틸 수는 없다. 할아버지의 주체, 아버지의 선군 깃발을 내려야 한다. 홀로 살아가겠다는 주체를 버리고 이웃과 더불어 살겠다는 개방을 해야 성장에 필수적인 자본이 들어온다. 안 그래도 모자라는 재원을 국방에 쏟아붓는 선군에서 벗어나 주민의 삶을 우선하는 선민(先民)과 선경(先經)으로 개혁해야 성장의 동력이 확보된다.

김정은의 노래라는 ‘발걸음’은 “찬란한 미래를 앞당겨 척척척”이라는 가사로 끝난다. 최근 발표된 ‘강성대국이 보인다’에서는 “장군님 세계 향해 대문을 열고”라는 구절이 포함되었다. 그렇다. 세계를 향한 개방과 개혁의 문을 활짝 열지 않고서는 찬란은커녕 암울한 미래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 인수위원회는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 김정일이 죽거나 상왕(上王)으로 물러날 때까지 기다려서는 늦는다. 과감한 개방과 개혁, 그것이 북한 인수위원회의 역사적 사명이고, 진정한 강성대국을 만드는 ‘발걸음’이다.

조동호 이화여대 교수·북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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