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 홀딱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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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 읽기를 무척 좋아하는 편이다. 좋은 책을 손에 잡고 하염없이 읽어갈 때의 즐거움은 언제나 변함없는 내 삶의 큰 활력소다. 대학교수로서 말하기 부끄럽지만, 나는 독서삼매에 빠진 적은 여러 차례 있어도 진정한 의미의 연구삼매는 아직 경험해 보지 못했다.

내 전공이 경영학인 만큼 경영·경제 서적도 많이 읽지만 문학·역사·철학 등 인문학 분야, 그리고 정치학·사회학 등 인접 사회과학 분야의 서적도 탐독한다. 또한 불교의 여러 경전이나 명상에 관한 저술들처럼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책들도 틈틈이 읽고 있다.

그런데 지난 몇 년간 읽은 책들 중에서 나에게 가장 깊은 감명을 주었고, 그래서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책은 단연 벽초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순간부터 그야말로 푹 빠져버렸다. 그리고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정신없이 읽었다. 정말로 책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우선 벽초 선생의 빼어난 문장력과 풍부하기 짝이 없는 어휘에 압도당했다. 『임꺽정』은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크나큰 자긍심을 심어주는 참으로 고마운 작품이다.

또한 16세기 중반 당시의 조선사회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구수한 언어로 재현해 내는 역사적 안목, 그리고 수많은 단편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면서도 전체적인 구성을 빈틈없이 하는 작가로서의 역량도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곽오주·배돌석이·길막봉이·이봉하 같은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그려내는 솜씨와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숱한 멋진 말의 향연은 화려하다 못해 현란하기까지 하다. 나는 이 작품이 우리 문학사의 가장 높은 봉우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세계문학의 무대에서도 해외 대작에 비해 결코 못하지 않다고 확신한다.

『임꺽정』은 우리에게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같은 조선인들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게 해 준다. 이렇게 조선인의 마음과 정조(情調)를 누구보다 잘 그려낸 이 작품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한국적인 작품이며,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인 문학작품들과 반열을 같이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중기의 양반과 상민들의 세계, 기생문화, 음악·시조·궁중문화, 도적들의 세계, 관청문화 등 한 시대의 여러 측면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는…. 『임꺽정』이야말로 우리 한국인들이 꾸준히 애독하고 보급해야 할 아주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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