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View] 김영철의 차 그리고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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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F1 코리아 그랑프리를 앞두고 3일 열린 시티 데모 행사에서 르노 F1팀의 R29 머신이 서울 태평로를 질주하고 있다. [뉴시스]

현재 국내에 등록된 자동차 대수는 1765만 대다. 자동차 한 대당 인구가 2.83명이다. 이런 숫자라면 자동차가 생활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자동차화 돼간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1800만 대에 가까운 수많은 차 중에서 개인이 자가용으로 장만한 차도 많을 터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차를 구입할 땐 어떤 기준에 따라 선택하고 또 구매를 결정하는지 궁금하다.

현재 시중에는 엔진이 큰 것, 작은 것, 문이 둘 달린 쿠페, 문이 넷인 세단, 문이 다섯인 해치백, 오픈카(Convertible), 엔진이 앞쪽에 있는 차, 뒤에 있는 차, 전륜구동, 후륜구동, 사륜구동, SUV, 자동변속기, 수동변속기 등 수없이 많은 종류의 모델이 판매되고 있다.

이 중에서 마음에 드는 메이커와 모델을 심사숙고 끝에 골랐다 치더라도 차량의 색상을 선택해야 하는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다. 이웃집 차와는 다른 색, 직장 동료 눈에 너무 튀지 않는 색, 판매원이 추천하는 색 등을 고려하다 보면 정작 본인이 좋아하는 색을 선택하기보다는 주변 사람의 눈을 의식해 정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차량의 색상이 차주의 성격을 나타낸다는 설(設)을 감안한다면, 이웃집이 무슨 색의 차를 타고다니건, 남이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이 본인의 이미지 관리에 적합한 색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듀폰 페인트사의 리트리즈 아이즈만은 인간과 차량 색상에 관한 연구자료를 발표한 적이 있다. 은색 차량을 소유한 사람은 우아하고 미래지향적인 외모에 자신만만한 성격을 지녔다. 흰색 차량의 차주는 까다롭고 잘 가리는 성격이라고 한다. 빨간색은 섹시하고 날렵하고 매우 동적인 성격을 나타낸다고 한다. 연한 파란색은 매사에 충실하고 조용한 성격에다 쿨하고 침착한 성격을 상징한다. 진한 파란색은 자신만만하고, 하는 일 모두 확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이며, 짙은 회색이나 엷은 갈색은 원초적이고 취향이 단순하다고 돼 있다. 검은색 차 소유자는 권력을 승계받은 사람처럼 행동하고, 조정하기 매우 힘든 성격일 뿐 아니라 고전적인 것, 우아한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회사 대표, 정부 관리, 국회의원이 검은색을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엷은 회색은 착실하고, 협조적이고 실질적인 성격을 지녔다. 진한 초록색은 전통적이고 신용이 높은 사람이라고 한다. 갈색 차 소유자는 솔직하고 허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진한 보라색은 창조적이고 독창적인 성격을 소유한 사람이 좋아하는 색이라고 한다.

어쨌든, 고심 끝에 흰색으로 결정하지만 판매원이 주문이 밀려 6개월 후에나 인수할 수 있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금방 출고가 가능한 색상을 선택하게 마련이다. 전혀 섹시하지 않은 사람이 상황에 밀려 ‘섹시한 사람’이 소유한다는 빨간색을 택할 수도 있기에 사실 차량의 색상만 보고 그 사람의 성격을 판단하는 것은 어불성설임에 틀림없다.

차를 살 때는 누구나 가격을 비롯해 본인 수준에 맞게 차종을 고르려 한다. 그러나 누군가 나에게 가격에 상관없이 마음에 드는 차를 고르라고 하면 나는 과연 어떤 기준에 맞춰 차를 선택할까?

0에서 시속 100㎞까지 속도를 올리는 데 3.5초 정도 걸리는 차도 좋겠고, 보닛이 플렉시글라스(Flexiglas)여서 보닛을 올리지 않아도 어항 속을 보듯 엔진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차라면 더더욱 좋을 것이다. 정차해 있는데도 그 위용이 느껴지는 차, 기계 속에 디자인과 스타일이 함께 녹아 들어가 있는 예술작품 같은 차가 있다면 그 차도 좋으리라. 대담한 스타일 속에 관능적인 선이 뚜렷하게 돋보이는 낭만에 젖은 디자인이라면 그 차도 나를 충분히 흥분하게 만들겠지만, 정작 내가 차를 선택할 때는 앞서 열거한 이유에서 차를 선택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차의 외모가 어떠하건, 마력수가 어떠하건 상관없이 엔진 소리를 들어보고 만족스러우면 선택하고 싶다. 지난 주말 서울 광화문 거리에서 내뱉는 포뮬러 원(F1)의 엔진 소리, 그런 소리를 지닌 엔진을 장착한 차를 나는 갖고 싶다. 이탈리아 명차 중에 그런 엔진을 장착한 차가 있다. 엔진의 분당 회전수가 2000RPM에서 3200RPM까지는 신음도 보채는 소리도 아닌, 뭔가 갈구하는 듯한 소리를 낸다. 4000RPM까지 올라가면서 신음이 아닌 찢어질 듯한 소리를, 그러나 거짓 없고 숨김 없는 신음소리를 낸다.

조금 더 밟아 회전수가 4000RPM을 지나 5000RPM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할 때 엔진은 깊고 깊은, 하지만 폭넓은 중저음을 토해 낸다. 안정되고 평온한 상태에 도달하지만 아직 멀었다는 듯한 소리를 낸다. 이때 8개의 피스톤이 밀어내는 배기가스가 배기관을 통해 소음기(Muffler)를 지날 때쯤이면 소음기는 악을 써서 배기가스 소리를 소음(消音)하려 하지만, 소용돌이치며 마구 밀려오는 배기가스에 격렬하게 부딪치고 신음 아닌 신음 소리를 내게 마련이다. 오르가슴에 다다랐을 때 터져나오는 포장하지 않은 솔직한 만족과 아쉬움 같은 엔진소리 말이다. 나는 디자인과 성능 다 빼고 엔진소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 차를 선택할 것이다.

가야미디어 회장 (에스콰이어·바자·모터트렌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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