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2. 안과 바깥 <99>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하여튼 여름 방학이 가까워질 때까지 택이와 나는 화계사 뒷산 능선의 동굴에서 지냈다. 함께 있는 날도 많았지만 절반쯤은 서로 교대로 혼자서 굴을 지키고 앉아 있던 때도 많았다. 양식이 떨어지면 차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집이 부자인 상득이나 민기를 불러내거나 집으로 쳐들어가기도 했다. 또는 지방에서 올라와 혼자 자취를 하는 친구의 자취방으로 가서 양식을 탈취해 오기도 했다. 우리는 그런 짓을 전쟁 시기에 쓰던 말로 '보급투쟁'이라고 했는데 나보다는 택이가 더 적극적이었다. 그 서너 달 동안에 나는 잘 있다는 식으로 몇 줄 적은 엽서를 두 번인가 어머니에게 보냈다. 어머니는 그 뒤 몇 년 동안 특히 베트남 전쟁터에서 돌아올 때까지 나를 기다리는 데 이골이 났을 것이다. 나중에는 그 간절함이 전달되었는지 내가 지방으로 어디로 떠돌아다니다가 집에 불쑥 들어가면 특별한 음식을 한 두 가지씩 해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의아해 하면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전에는 네가 올 때쯤이면 꼭 느이 아부지가 보이더니…. 요즈음은 네가 직접 집으로 오더구나.

그때 당신은 아직 사십대였다. 내가 이만한 나이가 되어서 하는 말이지만 그녀는 아직 젊고 예뻤다. 이미 그녀의 손을 떠나 버린 열병에나 걸린 듯한 아들을 기다리며 베트남 전장에 나가 있을 적에는 나를 후방으로 빼낸다고 영관급 장교가 된 동네 청년을 찾아 백령도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뒷날 그녀는 내가 전국으로 문화운동 조직을 한다며 돌아치던 광주 시절에 돌아가셨다. 그녀의 말년 사진은 아직도 내 방에 그녀의 증손녀들 사진 옆에서 쓸쓸히 웃고 있다.

하루는 내가 혼자 굴을 지키고 있다가 이른 아침에 미아리 종점까지 나가서 성진이에게 전화를 했다. 동화에 전화를 했는데 그는 거처를 옮겼다고 했다. 전화번호를 알려 주어 그리로 했더니 잔뜩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성진이가 전화를 받았다.

-웬일이냐?

-자기야말로 웬일이야, 거기서 뭘 하는 거야?

-응, 나 여기 친구 화실인데 그림 그리러 꼽사리 꼈다. 밥은 먹었니?

-쌀 떨어진 지 한 이틀 됐나, 택이는 보투 나가서 안 왔어.

-그럼 일루 와.

등교하는 학생들이며 직장에 출근하는 남녀가 물결치는 거리, 만원 버스의 그 긴장감, 시내 중심가에서 멀어질수록 버스와 전차 안은 한적해지고 노인이나 나 같은 부랑자 몇 명이 멀찍이 떨어져서 앉았을 뿐이다. 성진이가 전화로 불러준 대로 적은 쪽지를 들고 찾아갔는데 부근에 목조 이층의 적산가옥은 그 집밖에 없어서 멀리서도 보일 정도였다. 아래층은 담배가게 겸 구멍가게와 미용실이 붙어 있었고 이층이었다. 좁다란 계단을 올라가는데 벌써 성진이의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들려왔다. 아침밥 먹기 전에 체조 대신 그가 하는 짓이었다. 나무 문짝에는 주먹 쥔 손가락 틈에 엄지를 끼워서 내민 엿 먹이는 형상의 그림이 압정에 꽂혀 있고 그 아래 '아우트'라고 씌어 있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