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의 무기’ 접대 골프 매뉴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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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호 14면

그의 이름은 갑(甲), 내 이름은 을(乙)이다. 라운드를 앞두고 나는 분주해진다. 무엇보다도 갑의 집이 어느 쪽인지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갑의 집 위치를 확인했다면 그의 집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골프장을 예약하는 게 접대 골프의 기본이다. 드디어 라운드 당일. 나는 서둘러 골프장으로 향한다. 최소한 티오프 1시간 전엔 골프장에 도착해 모든 준비를 마친다. 옷을 미리 갈아입은 뒤 프런트 데스크 앞에서 갑을 기다리는 건 을의 기본이다. 갑이 클럽하우스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마치 TV에 나오는 어느 정치인처럼 고개를 90도로 숙인 뒤 그의 두 손을 맞잡는다.

정제원의 캘리포니아 골프 <131>

“어서 오십시오.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을은 라운드에 앞서 꼼꼼히 준비물을 챙긴다. 프로 숍에 들러 갑에게 선물할 골프공과 장갑 등을 산다. 내기 골프를 위해 현금자동지급기에 들러 두둑하게 실탄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1번 홀 첫 번째 티샷은 언제나 갑의 몫이다. 눈치 없이 먼저 티샷을 하겠다고 덤비는 건 을이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길이다. 행여나 갑이 친 공이 OB구역으로 향한다면 때를 놓치지 않고 큰소리로 이렇게 외쳐야 한다.

“몰간(멀리건)!”
나는 갑의 스윙 폼이 우스꽝스럽더라도 못 본 척한다. 행여 갑이 헛스윙을 하거나 쪼루를 낸다 해도 피식 웃는 건 금물이다.

갑과 을의 접대 골프에선 1번 홀 스코어가 정해져 있다. ‘올 보기’ 정도가 아니라 ‘일파만파’가 접대 골프의 기본이다. 만약 갑이 더블 파를 기록했다 하더라도 을은 서둘러 ‘일파만파’를 외쳐서 갑을 안심시켜야 한다.(일파만파란 한 사람이 파를 기록하면 다른 사람의 스코어에 상관없이 일행 모두의 스코어를 파로 적는 걸 말한다.) 을은 라운드 도중 썰렁해질 때마다 재미있는 유머를 동원해 분위기를 띄워야 한다.

“하루는 깍두기, 아니 조직폭력배 2명과 영어에 능통한 재미동포 2명이 함께 라운드를 했더랍니다. 재미동포 한 명이 때린 공이 OB선상에 떨어졌는데 옆에 있던 또 다른 이가 (OB가 아니라는 뜻에서) 이렇게 외쳤다지요. ‘노 프로블럼(No Problem).’ 그러자 티샷을 했던 재미동포는 ‘리얼리(really)?’ 하고 말했답니다. 이번엔 깍두기가 티샷을 할 차례. 깍두기 형님의 공은 재미동포의 티샷과는 달리 창공을 높이 날더니 페어웨이 한가운데를 갈랐답니다. 그때 재미동포 두 사람이 하던 말을 귀담아 들었던 깍두기가 외쳤다지요. ‘높아 부러.’ 그러자 옆에 있던 또 한 명의 조폭이 말했답니다. ‘늴리리.’”

갑의 실력이 뛰어나다면 을은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갑의 실력이 신통찮아 을에게 번번이 깨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는 가끔씩 OB를 내서 갑의 쓰린 속을 달래줘야 한다. 경우에 따라선 일부러 OB를 낸 뒤 이렇게 외친다.
“이번 홀엔 뒷문을 열어두겠습니다.”

그러고는 파4홀에서 10타 정도를 기록해 준다. 주말 골퍼들 사이에선 보통 양파(더블 파)까지만 카운트하는 게 관례지만 접대 골프에선 가끔 뒷문을 열어놓고 을의 타수를 끝까지 세는 것이다. 나는 상대방이 종종 ‘갑질’을 하더라도 집에 두고 온 토끼 같은 자식들을 생각하며 꾹 참는다. 오늘도 해가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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