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가 꼭 알아야 할 ‘안전빵 신직장인’의 속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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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불황 터널의 끝이 보인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종언(終焉)을 구하는 듯하다. 한국경제는 바닥을 치고 비상을 꾀한다. 전례 없는 불황이 막바지에 다다른 지금 많은 게 변했다. 철옹성 같았던 몇몇 글로벌 기업은 간판을 내렸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기업과 CEO(최고경영자)는 난세의 영웅이 됐다. 직장관(觀)도 크게 변했다. 상시 위기의 시대를 직감한 2010년 직장인은 불황 전 직장인과 다른 양태를 보인다. 그게 뭘까. 이코노미스트와 글로벌 경영 컨설팅 전문기업 타워스왓슨이 공동으로 분석한 ‘한국판 신(新)직장인 보고서’를 공개한다. CEO가 꼭 챙겨야 할 인적자원 리포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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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이후 ‘천직’ 개념이 붕괴됐다. 완전 고용의 시대는 저물었다. 이 직업 저 직업을 전전하는 사람이 늘었고, 삼팔선(38세 퇴직), 사오정(45세 정년) 등 웃지 못할 신조어가 생겼다. 외환위기가 종래의 직장관을 완전히 무너뜨린 것이다. 동아시아 경기침체와 날 선 구조조정이 몰고 온 변곡점이었다.

타워스왓슨-이코노미스트 공동기획 신(新)직장인 리포트 #2010년 직장인 사내 성장보다 자기계발 원해 …

한국경제의 ‘허리’ 직장인은 졸지에 수동적 존재로 전락했다. 구조조정 명단에 오르면 군말 없이 사표를 던져야 했다. 회사가 마련한 퇴직 프로그램에 연명해 ‘은퇴 후 삶’을 설계했다. 외환위기 후 도입된 강력한 성과급을 포함한 연봉제는 직장인을 더 옥조였다. 동료보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선 회사를 위해 초개처럼 몸을 던져야 했다.

이런 경향은 외환위기가 끝난 2001년 후 5~6년간 지속한 듯하다. 타워스왓슨이 2007년 발표한 ‘한국 직장인 보고서’(국내 직장인 1000명 설문조사)에 따르면 ‘2007년 직장인’은 수동적 행태를 보였다. 사원 복지제도에 신경 쓰고, 퇴직 프로그램이 효율적인 기업을 좋은 직장으로 여겼다. 승진 기회가 많고, 성과급이 두둑하게 나오는 기업을 선호했다. 굳이 도전적 업무를 하려는 직장인은 많지 않았다. 기업의 재무적 건전성은 관심 밖이었다. 마냥 ‘괜찮겠지’ 했다. 외환위기를 잘 버틴 기업을 스스로 신뢰한 것이다. ‘2007년 직장인’에게 소속 회사는 안전한 울타리이자 성장의 발판이었던 셈이다. ‘일만 잘하고, 실적만 빼어나다’면 말이다.

생각의 좌표는 큰 위기 때 바뀐다. 직장관도 그랬다. 외환위기 때 형성된 수동적 직장관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을 기점으로 크게 변했다. 10여 년 만에 불황을 다시 겪은 ‘2010년 직장인’은 능동적으로 사는 법을 체득한 것으로 분석됐다. 타워스왓슨이 2009년 11월~2010년 1월 국내 대기업·중견기업 직장인 1000명을 상대로 조사한 ‘인적자원 보고서’(이하 보고서)의 결과다. 이코노미스트가 단독 입수한 이 보고서는 불황 전인 ‘2007년 직장인’과 불황을 겪은 ‘2010년 직장인’을 비교한 리포트다.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직장인’은 기업에 전폭적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상시 위험의 시대’를 직감한 이들은 기업에 먼저 묻는다. 재무 건전성은 괜찮으냐, 목표와 비전은 무엇이냐고 말이다. 성과급·스톡옵션 등 장단기 인센티브에 대한 기대가치는 떨어졌다. 반대로 경쟁력 있는 기본급을 원했다. ‘뼈 빠지게 일해도 회사 실적이 나쁘면 돈을 받지 못하는’ 인센티브 제도에 대한 일침이다. 가계를 기본급 중심으로 안전하게 꾸리겠다는 소리다.

직장인의 관심이 ‘회사’에서 ‘자신’으로 변한 것도 글로벌 불황의 여파다. 보고서에 따르면 사내 퇴직 프로그램에 대한 중요도가 눈에 띄게 약해졌다. ‘2010년 직장인’은 은퇴 후 삶을 책임지는 건 ‘회사가 아니라 나’라고 생각했다. 승진의 가치도 이전보다 희미해졌다. 오히려 도전적 업무, 경쟁적 프로그램을 갈구하는 직장인이 늘었다. 사내(社內) 성장보다 자기계발에 집중한다는 얘기다.

CEO를 바라보는 눈도 달라졌다. ‘2007년 직장인’은 인재양성·사원복지에 신경 쓰는 CEO를 유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2010년 직장인’은 기업의 비전·소명을 잘 전달하는 CEO를 원했다. CEO가 직장인과 가까이 있었으면 했다. 유능한 CEO의 잣대를 소통 능력으로 본 것이다. 타워스왓슨(한국) 박광서 대표는 “수동적 존재에 불과했던 직장인이 글로벌 불황을 겪으면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을 터득했다”며 “2007년 직장인이 회사라는 울타리 안에서 안정을 추구했다면 불황을 경험한 2010년 직장인은 자기계발을 통해 스스로 안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CEO는 질서를 만드는 사람이다. 직장인의 속내를 꿰뚫지 못하면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 기업의 새 좌표를 설정하기도 어렵다. 직장인이 ‘변심’하면 CEO도 ‘변신’해야 한다. 글로벌 불황이 CEO에게 남긴 새로운 과제다.

이윤찬 이코노미스트 기자 chan487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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