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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기업들 잇단 한국 투자 선진국 조건 갖췄다는 증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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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얼마 전에 어느 대기업 이사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외국의 유수한 경영인 한 분을 초청해 강연을 들었는데 이분이 강연 첫머리에 청중 열명에게 "당신들의 나라 한국이 선진국입니까 아니면 중진국입니까?" 하는 질문을 던지자 열명 모두 다 중진국이라고 대답했다. 이 강사는 "여러분, 다 틀렸습니다. 자동차산업, 조선산업, 정보.통신 산업에서 각각 일류, 대학교 숫자 최다, 그리고 가정마다 TV와 세탁기 등 가전제품을 다 갖추고 있다는 점, 이 다섯 가지만 봐도 한국이 선진국이 아닐 수 없다" 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외국 경영인은 자기가 보고 아는 그대로 말했겠지만 아마도 그 자리에 있던 대기업 이사들은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만큼 우리는 자신에 대한 평가에 인색하거나, 아니면 화려한 외형에도 불구하고 나날이 겪는 사회질서나 생활관습에 부끄러운 점이 있어 그런지도 모른다.

물론 갖가지 부패.부조리와 불합리한 우리 사회의 어둡고 얼룩진 모습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산업화와 근대화, 그리고 민주화의 격동을 겪으면서 재편돼가는 사회질서 속에서 어느 정도의 불합리와 갈등, 고통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각 부문에서 시민사회가 스스로 일어나 이를 개선하고자 노력한다는 것은 선진국민으로서의 사회의식이 성숙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울러 지방자치의 바탕 위에 나라 전반에 자율과 경쟁이 한층 심화되고 있는 것도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앞당겨온 바람직한 진전이다.

해방 후 60년을 돌아보는 이 시점에서 그동안 우리가 바른 방향으로 진전해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우리의 기업들이 세계 일류가 됐고, 한류가 어떻게 이처럼 해외로 퍼져나가며, 어떻게 우리의 과학기술 연구가 세계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자원이 없고 민족성이 글러서 선진국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운명론적 비관주의에 오랫동안 침잠돼 있었던 탓으로 아직도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그런 나머지 우리가 하는 일에 부정적인 시각부터 갖는 버릇을 길러 오지는 않았을까. 국민소득이 1만달러에서 정지돼 버릴 듯이 우리 경제를 비관하는 것도 이러한 오래된 버릇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외환위기를 겪고 나서 자신감이 많이 상실됐지만, 우리의 실질 생활은 이미 1만달러대는 훌쩍 뛰어 넘은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외환위기, 아니 그보다도 더 모진 온갖 위기를 겪고도 번번이 일어섰으며 그때마다 서있는 자리를 오히려 더 탄탄하게 해온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최근 많은 외국의 일류 첨단기업들이 우리나라에 투자를 해오고 있다. 물론 이들은 돈벌이가 잘될 것이라 보고 들어온다. 그러나 외국기업들은 우리의 일류기업에 부품을 공급하거나 합작해 아시아시장, 나아가 세계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들어오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과 여건이 이제 그만큼 성숙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도 연구인력이나 기술 면에서 이미 선진국으로서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다. 오랜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일궈온 우리의 우수한 문화와 교육에 대한 열정, 그리고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가 있는 한 우리는 선진국일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으리라.

정달호 경기도국제관계자문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