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내 생각은…

무분별한 호주제 폐지를 반대한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최근 헌재의 결정은 독립기관의 위상을 돋보이게 한다. 그런데 굵직한 사안의 결정은 늘 여론이라는 시류와 일치하였다. 민주주의가 성숙한 덕인가, 아니면 법리적 원칙을 따르거나 미래를 책임지려는 태도가 없어서인가.

가계의 혈통을 잇는 자가 호주가 되는 고정관념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 호주제는 자구(字句)만으로는 남녀를 차별하는 내용이 있다. 가문과 혈통의 명예를 지키려는 태도를 찾기 어려운 현실에도 맞지 않는다. 권력자, 자녀나 친인척이 부정부패에 연루되고 책임지지 않는 것을 보아 왔다. 때로는 정치적 부활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본다. 이러니 가문과 혈통 운운하며 호주제를 지지하는 것은 호소력이 없다. 시대가 바뀐 것이다.

실질적 권한이 없는 호주제 폐지가 지니는 것은 상징성이다. 그런데 과연 호주제를 폐지하면 남녀차별이 없는 사회로 진일보할까. 제안된 일인일적제는 오히려 보통의 남녀 사이에 불평등을 강화시킬 소지가 있다.

한 인격체의 권리를 존중하는 일인 중심의 신분등록제가 가져올 폐단을 생각해 보자. 현재는 남편이 혼외자녀를 호적에 올리는 것이 어렵다. 남편의 부정을 인고(忍苦)하는 아내는 이제 없다. 따라서 이혼을 생각하지 않는 한 혼외자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로운 신분등록제에서는 혼외자녀 개인을 중심으로 부모를 기록하면 되기 때문에 아내 모르게 출생을 공식화하는 데 문제가 없다.

만약 아버지의 혼인관계로 혼외자녀의 신분등록이 거절된다면 위헌이며 새로운 생명이 신분을 인정받을 권리가 아버지의 부정에 의해 침해되는 연좌제에 해당된다. 그런데 아내의 경우 남편 모르게 출산할 수는 없다.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를 위헌으로 판결하여 근본적으로 고칠 수 있어야 균등해질 것이다.

재혼 가정의 자녀가 계부의 성으로 바꾸는 것이 문제를 없앨 것인가? 재혼 가정이라고 밝히는 것이 문제라고 인식한다면 재혼 자체가 떳떳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진실을 감추고 포장한다고 문제가 없어질까. 살다 다툼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 부부다. 자녀문제로 다툴 때 내 자식이니 네 자식이니 탓할 것이다. 자녀의 정신적 갈등은 커지고 오히려 정체성의 혼란이 증대될 것이다. 친자인 경우도 나를 닮았느니 너를 닮았느니 하며 다투는데, 재혼 부부가 더 현명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재혼한 아내가 아이를 두고 떠나거나 죽었을 경우 계부가 키우려하지 않을 수도 있다. 친부에게 아이와 성을 찾아가라고 할 것인가? 탁구공이 될지도 모른다. 출생을 숨기기보다 자녀의 두 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성숙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재혼이 최선을 다한 성실한 결정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 눈가리고 아옹하는 것보다 더 낫다.

합의로 자녀의 성을 정하게 되면 많은 남편이 아내의 성을 따르게 하는 것을 선호할 것이다.

명목상으로는 고리가 없어 혼인 중은 물론 이혼할 경우 책임지지 않을 구실이 되기 때문이다. 이혼 후 아버지가 양육비를 부담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부계 혈통으로 성을 따르는 고정관념에서 파생된 것이다. 결국 보통의 여자들은 호주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의도하지 않은 고통에 빠질 것이다.

호주제가 바람직한 가치가 있어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충분한 논의없이 조변석개(朝變夕改)할 수 없는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권한이 없는 호주제를 폐지하기보다는 호주제 폐지의 묘한 논리를 적극 수용하는 선에서 호주제를 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류를 잘 파악하는 헌재가 국민의 뜻에 시간을 두고 맡기는 것이 좋겠다. 어쩌면 국민 개개인에게 맡겨 자연스럽게 새로운 관습을 만드는 것이 일인일적의 신분등록제보다 사회 발전을 더 잘 보장할 것이다.

정민걸 공주대학교 교수.환경교육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