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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 버튼만 눌러도 한 달 전기료 15% 절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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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호 22면

스마트그리드(Smart Grid)는 ‘똑똑한 전기’다. 첨단 정보통신기술로 전기 사용량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지능형 전력망’을 뜻한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차세대 기술이다. 유럽 쪽이 좀 앞서 있지만 한국이 맹추격 중이다. 차세대 기술 쪽엔 한국이 되레 앞선다. 잘만 하면 또 하나의 미래 먹을거리가 될 수 있다.

세계 최초 ‘똑똑한 전기’ 실험, 제주 KT스마트그리드센터 가보니

현재의 전력공급 시스템은 실제 사용량보다 10% 정도 많이 생산한다. 혹시 전기 소비가 급증해 정전될까 해서다. 발전소도 필요보다 많이 짓고, 석유·석탄 소모도 많으며 이산화탄소도 많이 배출한다. 스마트그리드는 이런 낭비를 없애 준다. 생산자는 전기가 남는 시간대엔 발전량을 줄이고 소비자는 전기 값이 싼 시간대에 집중 사용하면 된다. 이걸 실시간으로 도와주는 게 스마트그리드다. ‘똑똑한 전기’라고 불리는 이유다. 지식경제부에 따르면 국내에서 스마트그리드를 제대로 구축할 경우 2030년까지 원유 3억4400만 배럴(47조원어치)을 덜 수입해도 된다. 발전소 건설비용도 3조2000억원을 절약할 수 있다. 이산화탄소도 2억3000만t을 덜 배출하게 된다.

파급 효과도 크다. 전력회사는 물론 통신업체, 태양광발전기와 축전지 등을 만드는 전자·화학업체, 전기자동차를 생산하는 자동차업체 등이 모두 참여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세계 스마트그리드 관련 산업 규모가 지난해 693억 달러에서 올해는 897억 달러로 성장할 것으로 추산했다. 2014에는 1714억 달러에 달할 전망이다.

전기차

제주시 세화리·평대리 200여 가구서 실험
9일 오전 제주공항은 햇살이 눈부셨다. 남쪽으로 30여 분 달리자 갑자기 굵은 빗줄기가 퍼붓는다. “역시 제주도” 소리가 나올 때쯤 KT 성산포지사에 도착했다. 제주스마트그린센터는 성산 일출봉이 저 멀리 보이는 이 건물 2층에 자리 잡고 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운영되는 스마트그리드 시험단지를 총괄하는 컨트롤타워다. 자동차로 10분 거리인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와 평대리 일대 200여 가구의 전력 사용 내역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한다.

한쪽 벽에 붙어 있는 대형 스크린에는 시간대별로 전력 소비량이 표시된다. 가구마다 4개씩의 가전제품을 선택해 사용정보를 보낸다. 고석범 KT 제주스마트그린센터장은 “지난 넉 달간 모니터링해 보니 지역별·시간대별 사용 패턴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고 말했다. 농가가 많은 세화리는 아침저녁으로 사용량이 많고, 상가가 있는 평대리는 그 반대라고 한다. 고 센터장은 “1단계로 실시간 전력 사용량을 파악해 사용자가 아껴 쓰도록 유도하고, 2단계로는 태양광·풍력발전기와 축전기를 설치해 에너지를 자급하는 게 목표”라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KT는 올해 안에 실증단지 내 52가구와 학교·병원 등에 발전기와 축전지를 설치할 예정이다.

현재는 1단계 사업만 진행 중이다. 척 봐서는 별 게 없다. 실시간 모니터링 기능이 있는 콘센트(디지털탭)로 가전 제품을 연결만 하면 된다. 디지털탭과 인터넷으로 연결된 디지털 전력계로 전기 사용량을 점검한다. 전기 사용량은 KT의 인터넷전화(VoIP) 단말기로 확인할 수 있다. 단순한 데 비해 효과는 의외로 크다. 평대리에 사는 조영미씨는 “지난달 전기요금이 8만 몇 천원으로 월 12만원씩 나왔던 지난해 여름보다 뚝 떨어졌다”며 “올해는 무더위로 더 많이 에어컨을 썼는데 요금이 줄어 만족한다”고 말했다. 조씨는 “어떤 제품이 전기를 많이 쓰는지 눈에 보이니까 덜 쓰게 된다”며 “외출할 때는 냉장고만 빼고 전원을 차단한다”고 덧붙였다.

평대리 사무실에 이 시스템을 설치한 이영석 이장은 “사무실을 비울 때 ‘외출’ 버튼만 누르면 냉장고처럼 늘 켜놔야 하는 기기를 제외하고는 전원이 차단된다”고 말했다. 물론 개별 기기별로 전원을 끊거나 연결할 수 있다. 지금은 PC와 유선전화기로만 조작할 수 있지만 앞으로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 등으로도 확인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밖에서 스마트폰으로 가정이나 사무실의 전기를 켜고 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KT 스마트그린개발단장인 전홍범 상무는 “스마트그리드는 ‘전기를 얼마나 쓰는지 눈으로 보면 더 아끼게 될 것’이라는 단순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구글은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전기 사용량을 확인할 수 있는 응용프로그램(앱)을 만들어 직원들에게 제공한 적이 있다. 앱을 설치한 직원들의 전기 사용량을 조사해보니 60% 줄어들었다는 결과를 내놨다. 전 상무는 “구글은 극단적인 경우고, 일반적으로는 15% 정도 절약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실험 결과”라고 설명했다. 여기까지가 1단계다.

2단계는 한 발 더 나간다. 전기를 스스로 생산한다. 고 센터장은 “가정에 태양전지나 지열발전 등을 설치해 필요한 전기를 직접 만들고, 남는 전기를 모아뒀다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다”고 말했다. 모자라는 부분만 전력회사에서 사오면 된다. 남으면 한국전력에 팔아 돈을 버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과정은 통제센터에서 자동으로 대행해 준다. 스마트그리드가 완성되면 전기회사는 시간·장소별로 요금을 다르게 매길 수도 있다. 전기를 많이 쓰는 낮에는 비싼 요금을, 밤에는 낮은 요금을 받는다는 것이다. 고 센터장은 “가정에서 요금이 비싼 시간에는 모아놓은 전기를 팔고 싼 시간에 충전하는 방식으로 전기요금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걸림돌은 초기 시설투자비다. 1단계는 가구당 20만원이 든다. 그러나 2단계로 태양전지와 저장장치까지 갖추려면 3500만원이 필요하다. 제주스마트그린센터 이영철 과장은 “전기요금을 아낀 것으로 2단계까지의 투자비를 뽑으려면 11년이 걸린다”고 말했다. 개인이 설치하기는 부담이 크다. 그렇다고 정부가 돈을 다 대줄 수도 없다. 그래서 전력회사나 통신업체의 참여가 필요하다.

KT의 스마트그린 담당부장인 김형수 박사는 “스마트그리드 1단계를 인터넷·휴대전화 같은 통신 서비스와 묶어서 제공하면 가입자들은 최소한의 추가 요금만 내면 된다”고 말했다. 대신 맞춤 광고를 보내는 등의 새로운 수익원을 찾아야 한다. 김 박사는 “세탁기를 돌리는 가정에는 세제 광고를, 전자레인지를 가동하면 냉동식품 정보를 제공하는 등의 맞춤형 광고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전기를 한전에 파는 집에는 은행이나 증권업체의 투자 안내를 보낼 수 있다. 이런 수익을 전력회사 등과 나누면 사용자는 요금이 줄어서 좋고, 전력회사는 추가 투자 없이도 수익을 늘릴 수 있어 ‘윈-윈’이다.

G20 때 전 세계 대상으로 홍보
현재 제주도에는 KT 외에도 한전·SK텔레콤·LG전자 등이 각각 컨소시엄을 만들어 스마트그리드 활용방안을 시험하고 있다. 총 사업비의 절반인 580억원을 정부에서 지원한다. 제주도 외에도 도시 지역에 실증단지를 운영할 예정이다. 현재 대구·광주광역시 등이 참여 신청을 했다. 정부는 2단계 시설을 갖추는 가구에 시설투자비의 50%까지 지원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2030년에는 세계 최초로 전국에 스마트그리드망을 갖추는 것이 목표다. 전력과 재활용에너지뿐 아니라 수송·서비스까지 합친 것이다. 전체 투자액은 예산 2조7000억원을 포함해 총 27조5000억원으로 잡고 있다. 이를 통해 5만 개의 일자리와 74조원의 내수가 추가로 생길 것으로 기대한다.

KT의 제주 실증단지는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고 있다. 가구·기기별로 전기 사용량을 장기 점검하는 게 세계 처음이기 때문이다. 국내외 공무원·학자 등이 연이어 현장을 방문한다. 기자가 방문한 다음 날인 10일에는 대구시 관계자들이 현장을 찾았다. 제주 휘닉스아일랜드에서는 기술표준원·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부산대 등이 참가한 가운데 한국스마트그리드협회 주최의 세미나가 열렸다.

11월엔 이런 방문 러시가 절정에 이를 전망이다. 정부는 11월 11일부터 이틀간 서울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맞춰 ‘스마트그리드 주간’을 정했다. 구좌읍 행원리 5000㎡(1500평) 부지에 1000㎡(300평) 규모의 종합 홍보관을 만든다. KT는 전망대와 쉼터를 갖춘 스마트 카페 ‘올來(olleh)’를 운영한다. 한국전력의 홍보관 ‘스타지움’은 야간에 남는 전력으로 밤하늘을 수놓는다. SKT의 ‘스마트시어터’는 심야영화를 상영하고, LG전자의 ‘스마트하우스’는 1박2일 동안 스마트그리드를 직접 체험하는 공간으로 꾸민다. 지식경제부는 이런 홍보관을 묶어 관광상품을 내놓을 계획이다. 연내 ‘스마트그리드 육성법(가칭)’ 제정도 추진하고 있다.

국내 스마트그리드 기술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올해 초 미국 일리노이주 대표단이 스마트빌딩 구축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방한했다. KT 과천 관제센터에서 4000여 개에 달하는 전국 KT 건물의 전력 사용을 제어하는 시스템을 본 대표단은 “한국에서 15년 전 구축한 시스템을 미국 업체가 새로 개발할 필요가 없겠다”며 감탄했다. KT는 시카고 에이온센터 등 10개 고층 건물의 스마트빌딩 구축사업을 진행하는 양해각서(MOU)를 올 7월 일리노이주와 체결했다.

국내 기술을 국제 표준으로 하는 방안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은 지난달 KT의 스마트그리드 솔루션을 국제 표준으로 인정했다. 지금까지 유럽에서는 2세대(2G) 휴대전화망을 이용하는 기술을 사용했다. 가전제품에 ‘직비(Zigbee)’라는 무선 칩을 장착해 전력 사용을 모니터링하는 방식이다. 값이 싸지만 통신속도가 느려 다양한 부가서비스를 추가하기 어렵다. KT는 초고속인터넷을 활용한다. 지금은 광통신망을 주로 활용하지만 앞으로는 3G 휴대전화망은 물론, 무선인터넷(와이파이)·와이브로 등으로도 스마트그리드를 연결할 수 있게 된다. 김형수 박사는 ITU 스마트그리드포커스그룹의 부의장으로 선출됐다. 김 박사는 “KT 솔루션이 국제표준으로 인정되면서 개발에 참여한 한국 중소기업들도 외국의 스마트그리스 구축사업에 손쉽게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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