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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신여성’ 앞세웠지만 결론은 허영심 자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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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호 08면

1 시클 페르펙타 광고, 알폰스 무하(1860~1939) 작

올해 초 방영된 드라마 ‘제중원’에서 여주인공 석란이 구한말 저잣거리를 자전거 타고 달리는 장면이 있었다. 시장 사람들은 웬 규수가 두 바퀴 달린 괴상한 것을 타고 다리를 재게 놀려 앞으로 질주하자 아연해서 쳐다본다. 19세기 말 조선에 이미 자전거 타는 여성이 있었다는 것은 좀 믿기 어렵지만, 석란이 진취적인 신여성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문소영 기자의 명화로 보는 경제사 한 장면 <14> 무하와 로트레크의 예술적 광고 <下>

자전거가 발명된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19세기 말까지 여성이 자전거 타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자전거는 곧 신여성의 상징이었다. 당시의 여성해방운동가들은 자전거를 ‘자유의 기계’라 부르며 예찬했고, 반면 어느 보수적인 미국 목사는 자전거 탄 여성을 빗자루 탄 마녀에 비유하며 비난했다고 한다.

2 라 솅 생송(심슨 체인) 광고,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1864~1901) 작

그걸 생각하면 체코 출신 아르누보 미술가 알폰스 무하(1860~1939)가 디자인한 자전거 광고 포스터(사진1)가 예사롭지 않다. 아름다운 여성이 자전거 핸들에 몸을 기대고 서 있고,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이 아르누보(Art Nouveau) 스타일 특유의 우아한 선을 그리며 바람에 흩날린다. 포스터를 보는 사람은 그녀의 굽이치는 머리카락과 너풀거리는 옷자락을 통해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 몸을 스치는 바람을 공감각적으로 느끼게 된다. 이 이미지 광고는 여성들에게 자전거를 타고 그 시원한 속도와 해방감을 느끼라고, 멋진 신여성이 되라고 유혹하는 것이다.

이 광고는 여성에게만 어필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에 첨단의 탈것인 자전거와 함께 있는 여성의 모습은 오늘날 미끈한 승용차와 함께 있는 여성의 모습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광고는 멋진 탈것에 그에 어울리는 예쁜 여성을 태우고 폼 잡고 싶은 남성의 심리를 자극한다.

3 내셔널 램프 광고(1927), 콜 필립스(1880~1927) 작

요즘 들어 친환경 교통과 건강에 대한 관심으로 자전거의 인기가 부활하고 있지만 자전거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때는 저 무하의 포스터가 나온 1890년대였다. 그 시대 광고 포스터의 또 다른 대가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1864~1901)는 장애가 있는 몸이라 직접 자전거를 타지는 못했지만 자전거 경주 보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물랭루즈 같은 댄스홀과 서커스 광고를 주로 제작했지만, 드물게 자전거 체인 광고(사진 2)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자전거에 대한 열정 때문에 이 광고를 맡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이들 자전거 광고, 특히 상당히 우회적으로 자전거를 선전하는 무하의 포스터는 세련된 만큼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이 멋들어진 광고는 자전거의 용도와 성능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당신도 자전거를 사면 멋진 신여성이나 멋진 남자친구로 대우받으리라는 암시로 허영심을 자극할 뿐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 식으로 말하자면 이 광고는 상품의 사용가치가 아닌 기호가치만을 말하고 확산시키는 것이다.

이런 광고가 당시부터 현대까지 호소력을 지니는 이유는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서만 상품을 사는 게 아니라 그 상품을 가졌을 때 타인에게 비치는 이미지를 의식해 소비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유행에 따라 소비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또 소비를 통해 자신의 능력이나 지위를 과시하고 싶어한다. 미국의 경제학자 토스타인 베블런(1857~1929)은 이런 소비 행태를 처음 본격적으로 논하면서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라고 명명했다.

이런 소비 행태는 현대 주류경제학의 기초인 신고전학파 경제학(Neoclassical Economics)의 허점이기도 하다. 대개의 물건과 서비스는 신고전학파의 수요곡선에 따라 가격이 올라가면 수요가 감소하지만 어떤 사치품은 가격이 올라가도 수요가 별로 줄지 않거나 오히려 늘어난다. “나는 이렇게 비싼 것을 살 수 있다”는 과시욕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이런 상품을 ‘베블런재(Veblen good)’라고 부른다. 최근 샤넬은 클래식 핸드백의 가격을 전 세계적으로 크게 올렸는데, 그럼에도 수요가 별로 줄지 않으리라는 배짱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과시적 소비를 부추기는 주범이 바로 광고라는 게 베블런이나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미국의 경제학자 존 K. 갤브레이스(1908~2006)의 견해다. 무하의 포스터 같은 분위기 위주의 광고가 미국에서도 나오는 것을 보면서(사진 3) 베블런은 기업들이 물건 품질을 높이는 데보다 그럴싸한 광고로 소비자의 허영심을 부추겨서 많이 파는 데만 돈과 머리를 쓴다고 비난했다.

20세기에 더욱 현란해진 광고를 경험한 갤브레이스는 한 술 더 떠 소비재 광고를 아예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광고의 핵심 기능은 욕구의 창조에 있다”고 했다.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필요와 상대적인 욕구가 있는데, 광고는 광고를 보기 전까지 존재하지 않던 욕망을 일으켜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을 사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의존효과(dependence effect)’라고 불렀다.

광고에 대한 이런 비판은 날카롭고 일리가 있지만 반론의 여지도 많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1899~1992)는 갤브레이스의 이론에 대해 여러 면으로 반박했다. 특히 모든 문화예술 역시 필요가 아닌 욕구의 산물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사실 김홍도나 미켈란젤로의 걸작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나온 게 아니지 않은가. 갤브레이스 식대로라면 이것도 배척돼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광고가 욕망을 만든다고 해서 오로지 광고 때문에 소비를 결정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고, 또 품질 개선이나 혁신은 안중에 없고 광고에만 열중하는 기업의 생명력이 과연 얼마나 갈까. 자동차나 가전제품 같이 기능이 중요한 비싼 내구재를 광고가 멋있다고 덜렁 사는 소비자는 거의 없다. 과자나 음료 같은 싼 소비재의 경우에는 좋아하는 운동선수나 아이돌이 광고한다는 이유로 한번 사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맛이 없으면 계속해서 살 바보는 별로 없다. 광고는 소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소비의 첫 단계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뿐이다.

더구나 무하와 툴루즈-로트레크의 포스터는 그 자체로 예술적인 가치를 지녀 그 당시 공공미술의 역할을 했고, 요즘도 그렇게 미적 쾌감과 재미를 주는 광고들이 있지 않은가.그러나 기업이 광고에 많은 비용을 들이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다. 무엇보다도 그 비용이 소비자 가격으로 전가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다. 주류경제학에서는 담합행위만 제대로 차단되면 낮은 가격을 제시하는 경쟁 상품이 출현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합리적인 가격 균형이 이루어진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 장기적 균형이 너무 긴 장기여서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닌지 의구심을 품는 학자도 있다. 인간이 완전히 이성적인 소비 주체가 못 되고 또 광고가 그 점을 파고드는 한, 광고에 대한 논란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영자신문 중앙데일리 문화팀장. 경제학 석사로 일상 속에서 명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찾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관련 저술과 강의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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