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출장 땐 속옷·양말 손수 빨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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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브스코리아‘김우중 6년 비서’ 김용섭 전 대우정보시스템 사장이 인간 김우중에 대해 입을 열었다. 최근 김우중에 대한 책 <김기스칸 vs 칭기즈칸>을 낸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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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에 들어서자 화장대 앞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놓은 양말 두 짝이 눈에 들어왔다. 전날 신은 양말을 손수 빨아 넌 것 이다. 미국 동부의 한 도시에서 밤 비행기를 타고 중부 미주리주를 거쳐 전날 이른 아침 서부 샌프란시스코에 내린 우리 일행은 하루 종일 분주했다. 오찬은 5대 석유 메이저인 셰브론사 회장과, 만찬은 미국 3대 은행인 BOA 행장과 했다. 만찬 후 호텔에 든 김 회장은 ㈜대우 지사장과 대우조선 현지 책임자에게 보고를 받고 파김치가 되어 침실로 들어갔다.

비서가 털어놓은 인간 김우중

회장을 깨우러 들어간 나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그는 작은 세면대 앞에 상체를 구부리고 선 채 그 양말을 빨았을 것이다. 해외 출장길에 그가 자기 손으로 양말과 속옷을 빨고 드레스셔츠를 다려야 했던 것은 공항에서 수속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느라 기내에 들고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가방 하나만 휴대했기 때문이다.

보름씩 출장을 다닐 때도 달랑 가방 하나였다. 그 가방엔 캐주얼 양복 바지와 스웨터가 각각 한 벌, 드레스셔츠와 속옷이 각각 3벌, 그리고 양말 세 켤레가 들어갔다. 낮에 일 보고 밤 비행기로 이동하다 보니 호텔에 묵어도 세탁 맡길 기회가 없었다. 그 뒤로
나는 그가 양말을 벗어 놓으면 들고 나와 내 손으로 빨았다. 그후로도 그는 내가 들고 나오지 않으면 화장실에 들어가 양말을 빨았다. 비서의 직무에 양말 빨기 같은 것은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 다섯 살 아래인 40대 비서가 자기 양말까지 빠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회장과 중년의 비서 간 양말 먼저 빨기 신경전은 그 후 6년간 줄기차게 이어졌다.”

그 사나이는 김우중(74) 전 대우그룹 회장, 나 김용섭은 주미한국 대사관 일등서기관, 중앙정보부 심의관 등을 역임한 그의 비서다.“김 회장뿐 아니라 그의 해외 출장 수행원은 모두 그와 마찬가지로 기내에 실을 수 있는 가방 하나만 휴대했다. 그렇게 해서 짐 찾는 시간을 절약하는 한편 짐을 못 찾았을 때의 낭패도 차단했다. 비서로서 처음 김 회장을 수행했을 땐 그런 관행을 몰랐다.
짐을 찾아 공항 밖으로 나가니 회장 일행은 떠나고 지사 직원 혼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명색이 비서가 상전을 놓친 것이다.”

생일엔 경영진 집으로 초대
6년 동안 김우중 회장의 비서를 지낸 김용섭(69) 전 대우정보시스템 사장이 인간 김우중을 회고한 책 <김기스칸 vs 칭기즈칸>을 냈다. 8월 19일 만난 김 전 사장은 “활동영역을 기준으로 하면 김기스칸(김우중) 쪽 반경이 훨씬 더 넓었다”고 말했다.
“칭기즈칸은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문턱까지 갔지만 김우중은 동아시아 섬나라들, 호주, 북남미,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5대양·6대주에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대우는 1999년 무너질 당시 전 세계에 약 590개 법인과 지사를 거느렸습니다. 무엇보다 칭기즈칸이 잔인하게 정복해 일방적 지배체제를 구축했다면 김우중은 상생을 추구했어요. 현지에 공장을 짓고 일자리를 만들어냈죠.

또 기술과 경영 노하우를 전수했는데,말하자면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친 셈입니다.”김우중 회장은 젊은 수행비서를 1~2년 만에 교체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에 대해서는 ‘김우중식 강행군’에 젊은 사람들도 체력이 달렸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그러나 김 전 사장은“수행비서를 자주 교체한 것은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젊은 비서의 장래를 고려한 김 회장의 배려였다”고 주장했다. 비서로 오래 부리면 발전할 기회를 놓치기에 자신의 불편을 무릅쓰고 교체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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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회장 부인 정희자 아트선재센터 관장.김 회장 생일이면 집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경영진을 대접했다.


“저는 나이 마흔에 김 회장의 비서를 시작해 6년쯤 일했습니다. 김 회장은 1년에 50일 이상, 때로는 100일 가까이 수행비서 없이 저와 다녔어요. 6년이나 비서실에 저를 잡아둔 건 저의 장래는 고작해야 1000리 정도밖에 안 되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수행비서를 한 사람들이 요즘 사회활동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장래가 구만 리였다는 것을 새삼 알 수 있죠.”
“김 회장의 생일은 양력 12월 19일이다. 그는 생일날이면 대우 경영진 가운데 약 60명을 방배동 집으로 초대했다. 초대 받은 사람들은 6시쯤부터 하나둘 나타난다. 불가피한 약속이 있는 사람은 먼저 다녀가기도 한다. 지정석도 없지만 그 인원이 다 앉으려면 거실은 물론 안방까지 점령해야 했다. 참석자에게는 두툼하지 않은 돈 봉투가 하나씩 건네졌다. 고스톱·포커·마작을 하면서 걸 노름 돈이었다. 손님 접대는 김 회장 부인인 정희자 힐튼호텔 회장을 비롯해 딸, 아들, 동서, 조카 등 동원 가능한 모든 가족의 몫이었다. 그는 호텔보다 집에서 가족이 대접하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사람들이 거나해질 무렵 김 회장이 헐레벌떡 들어온다. 몹시 미안해하는 얼굴로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는 그도 마작이나 포커 판에 낀다. 얼마 후 손님들은게임을 계속하는데 주빈이 슬며시 일어선다. 수행비서와 비행장으로 향하기 위해서다. 내가 대우에서 일한 20년간 그는 예외 없이 생일날 집을 나섰다. 여러 해가 지나고 나서야 나는 그가 연말연시에 임원들을 불러내지 않으려고 출장을 떠나는 것임을 알게 됐다. 그는 으레 유럽을 거쳐 크리스마스 직전 아프리카로 날아갔다. 리비아에 우리 근로자들이 수천 명씩 있을 때는 리비아로 갔다.”

김우중은 리비아 협상 역으로 제격
리비아는 요즘 우리나라와 외교 마찰을 빚고 있다. 이 나라에서 일하던 국가정보원 직원이 간첩 혐의로 추방 당하면서 빚어진 일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명박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이 리비아로 날아갔지만 별 성과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중동학회장을 지낸 이희수 한양대 교수는 이와 관련해 “김우중 회장, 최원석 전 동아건설 회장처럼 언제든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를 만날 수 있는 민간 인사가 나서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이라면 모종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김 회장은 카다피와 여러 차례 만났습니다. 리비아에서 접촉한 핵심 인물의 수, 빈도, 접촉의 깊이 면에서 최원석 회장을 능가할 겁니다. 더욱이 중동 사람들은 사막이라는 자연환경 탓에 중국 사람 이상으로 인맥을 중시합니다.

가정이지만, 김 회장이 일차 정지작업을 한 후 대통령 특사가 정부 안을 들고 날아갔다면 일거에 해결될 수도 있었죠.”
김 전 사장은 책에서 김 회장의 국가관을 엿볼 수 있는 두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우선 중소기업과의 상생 방안에 대해 시사점을 던져주는 이야기 하나.

“비서실로 발령 받은 지 얼마 안 돼 부산의 대우실업 봉제공장을 방문했다. 당시 섬유는 우리나라 주력 산업이었고 부산 공장은 아시아 최대 규모였다. 부산 공장 사장이 재단사를 불러 나의 드레스셔츠 치수를 재게 하더니 옷감 샘플과 스타일 견본을 내놓고 나더러 12개를 고르라고 했다. 12개는 너무 많아 놀라는 나에게 그는 ‘한 장에 1달러에 수출하는 물건이니 부담 갖지 말라’고 말했다.

국내 가격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는 ‘국내 시장에 내다팔면 돈 많이 벌 텐데 김우중 회장이 말려서 못 한다’며 웃었다. 그 후 김우중 회장에게 그 이유를 물어볼 기회가 있었다. 그의 대답은 간명했다.


‘우리 공장 물건이 국내시장에 나가면 봉제공장 다 죽어. 수출만 해도 이익이 나는데 재봉틀 몇 대 놓고 먹고사는 사람들 모두 문 닫게 하면 죄 받지.’ 회장은 빙그레 웃는데 나는 가슴이 찡했다.”

김 회장은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직원 교육에 투자를 많이 했고, 중앙연수원 관리자 교육 때 회장 특강을 하는 날이면 아예 연수원에서 잠을 잤다고 김 전 사장은 회고했다. “전성기 때 대우는 매년 40명가량의 직원을 미국 등 선진국 대학 학위과정에 유학시켰다. 박사과정의 경우 3~5년이 걸렸고, 연간 5만 달러 이상 학비를 지원했다. 분야별로 미국 내 상위 20위권 이내 대학만 유학할 수 있었는데 이런 명문들은 학비가 비쌌다. 그런데 학위를 마치고 돌아와 회사를 떠나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인사팀에서 이를 막기 위해 일정 기간 일하도록 의무 근무 제도를 만들었다. 어느 날 사장단 회의에 이런 정책이 의제로 올라왔다. 김 회장이 ‘그런 거 하지 말지’라고 말했다.

‘떠나고 싶지 않은 회사를 만들어야지,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 잡아 놓는다고 일 잘하나? 지가 우리 회사 떠나 봐야 어딜 가겠어? 이땅에 있지’. 이렇게 해서 대우에서 유학생에게 부과됐던 의무근무가 없어졌다. 그랬다고 이탈자가 급격하게 늘어나지도 않았다.”김 전 사장은 또 2002년 월드컵 유치가 김 회장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서는 박철언 당시 체육청소년부 장관도 김우중 대한축구협회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범국가적으로 월드컵 유치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힌 일이 있다. 한 국기원 총재로 있을 땐 프로 바둑기사들이 바둑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전원 대기업에 취업시켰다. 1980년대 초 일본이 한국 바둑을 우습게 알 때였다. 그 후 한국 바둑은 일본을 따돌리고 세계 바둑계의 중심이 됐다.

대우의 붕괴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진단이 있다. 그중 빠지지 않는 것이 김 회장에게 의존한 대우의 1인 시스템이다. 김 전 사장은 이런 분석과 상충하는 여러 가지 사례를 책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는 또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가 대우 장병주 사장이 시작한 사내 이벤트를 김 회장이 전 그룹사에 확대하라고 지시해 마침내 전국적인 운동이 됐다고 소개했다. 요즘 각광 받는 일자리 나누기(Job Sharing)도 외환위기 때 김 회장이 처음 시도한 것이라고 증언한다. 김 회장은 지난번 8·15 특별사면 대상에서 제외됐다. 17조원이 넘는 추징금을 미납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 거액의 추징금을 납부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대우에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입은 분들은 아픈 기억이 남아있을 겁니다. 대우 몰락 당시 정부가 김 회장에게 기회를 줬다면 아마 추징금 정도는 충분히 상환할 수 있었을 거예요. 김 회장은 여전히 국제사회에서 상당한 명망과 네트워크가 있습니다. 이 사회에 기여할 기회를 주어 그에게 다른 방식으로라도 갚게 해야 합니다.”

글 이필재 경영전문기자 jelpj@joongang.co.kr
일러스트 박용석 사진 김현동 기자,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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