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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서 보던 그림’ 바깥 세상 나들이 선인들 해학 좀 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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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옛 사람이라고 욕정이 없었겠나. 지금은 춘정을 자극하는 것들이 쏟아져 넘치는 시대지만 옛날엔 기껏해야 야한 그림을 보는 정도였다. 춘화(春畵)는 숨어서 보는 그림이다. 그래서 소장가들이 좀체 내놓지 않는다. 그런데 한·중·일 3국의 수준급 춘화 114점을 한 자리에서 보여주는 전시가 마련됐다.

서울 평창동 화정박물관이 소장품 중 수위가 덜한 것을 골라 모은 춘화 특별전 ‘러스트(LUST)’를 14일부터 12월 19일까지 연다. 한혜주 화정박물관장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요·공급이 끊이지 않았으나 오랫동안 공개되지 못했던 춘화를 전시 및 학술의 대상으로 삼아 다각적인 접근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중국미술 컬렉션으로 유명한 화정의 이름답게 중국 작품이 가장 다양하다. 중국의 춘화에선 대개 화폭 안에서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 보통의 풍속화 같은 느낌을 주는 그림인데 다만 남녀가 벌거벗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에로티시즘의 종류는 현대의 그것 못지 않게 다양하다. 남녀의 애정행각을 제 3자가 훔쳐보는 그림, 여성 혼자 도구를 이용해 스스로 즐기는 모습, 여러 명이 뒤섞인 장면이 있는가 하면 달리는 말 위에서 묘기하듯 사랑을 나누는 그림도 있다. 적나라하다기보다 웃음이 배어나게 하는 해학이 엿보인다.

여성의 발에 대한 페티시즘도 유난하다. 불단(佛壇) 앞에서 무릎 꿇고 앉은 여성의 맨발을 연인이 뒤에서 몰래 만지는 그림이 그 예다. 전족을 본 딴 술잔 금련배(金蓮杯), 모조음경 등 성애 관련 공예품도 흥미롭다.

김옥인 책임연구원은 “19세기 중국과 일본에선 집에 춘화를 두면 불을 피한다고 여기기도 했고, 춘화첩을 딸의 혼수용품으로 챙겨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색채가 화려한 일본 춘화의 개성을 보여주는 ‘춘정제색(春情諸色)’, 에도, 기타가와 후지마로, 비단에 채색, 31X51cm㎝. 12장이 한 세트로 구성된 육필 춘화의 첫 장면. 뒤로 갈수록 노출 수위가 높아진다. 18세기 말~19세기 초 활동한 작가는 판화가 아닌 육필화를 전문적으로 그렸다. 섬세한 필치가 압권이다. [화정박물관 제공]

일본실로 걸음을 옮기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풍경 속에 조용히 스며든 한국이나 중국의 춘화와 달리 남녀의 정사장면이 클로즈업된데다 성기가 과장되게 표현됐기 때문이다. 누가 그렸는지 알기 어려운 중국이나 조선의 춘화와 달리 작자가 비교적 명확한 것도 특징이다. 일본은 에도 시대에 우키요에(浮世繪) 채색판화가 유행하면서 춘화가 대중화됐다. 현대적 느낌이 물씬 풍기는 색감에서 일본적 미학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정색하고 바라보기 민망하지만 뜯어보면 상당히 해학적이다. 가령 사랑을 나누다 잠이 든 남녀 앞에서 교미에 열중하고 있는 생쥐 한 쌍을 고양이가 방울소리도 내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을 담은 가츠시가 호쿠사이(1760~1849)의 판화가 그렇다.

한국의 춘화는 몇 없다. 그래도 신윤복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시장춘(四時長春)’을 볼 수 있는 건 큰 소득이다. 닫힌 문 앞에 급히 벗은 듯한 남녀의 신발이 놓여있고, 술상을 받쳐 든 계집종이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듯 엉거주춤 서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머릿속으로 그리게 하는 시(詩)적인 춘화다.

‘세크레툼(비밀)’이라 이름 붙인 별실에서는 서양의 에로틱 아트가 전시된다. ‘세크레툼’은 19세기 초 영국박물관과 나폴리고고학박물관 등에서 일부 허가 받은 사람에게만 극비리에 공개했던 에로틱 아트 전시실의 이름이기도 하다.

다음 달 2일에는 이화여대 홍선표 교수, 국제일본문화센터 하야카와 몬타 교수, 런던대 타이몬 스크리치 교수 등의 특별전 기념 강연회도 열린다. 특별전 관람료 5000원. 02-2075-0123.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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