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균과의 전쟁 인류가 패배할 수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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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호 20면

2008년 겨울 어느 날,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병원에서 골수 이식을 받던 11세 소녀에게 갑자기 박테리아 감염 증세가 나타났다. 이 박테리아는 대표적인 수퍼박테리아의 하나인 반코마이신 내성 장구균(VRE)으로 10개가 넘는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것으로 밝혀졌다. 의사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치료를 시도했지만 소녀는 며칠 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수퍼박테리아

병원은 역학자들을 동원해 이 수퍼박테리아가 어디에서 왔는지 병원 안팎을 샅샅이 조사했다. 그러다 같은 병동의 한 환자에게서 동일한 수퍼박테리아가 검출됐다. 한 환자에게 증세를 나타내지 않았던 수퍼박테리아가 이웃 병실 어린 환자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수퍼박테리아를 옮겼던 원래 환자는 보균자로 남아 이후에도 발병하지 않았다.

이 사례는 수퍼박테리아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무서운 세균임을 보여준다. 우선 면역력이 떨어지는 사람의 경우 일단 감염되면 목숨까지 빼앗는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 수퍼박테리아 보균자라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증세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철저한 검사를 하기 전까지는 자신도 보균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수퍼박테리아를 계속 전염시킬 수 있다. 미국·영국 등 10여 개 국가에서 이런 식으로 감염된 수만 명의 환자들이 매년 목숨을 잃고 있다.

이는 먼 나라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와 가까운 일본에서도 최근 감염 사실이 처
음으로 확인됐다. 이달 초 도쿄 데이쿄(帝京)대 부속병원은 27명의 환자가 수퍼박테리아의 하나인 다제내성 아시네토박터균(MRAB)에 감염돼 사망했으며, 이 가운데 9명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이 MRAB라고 발표했다.

MRAB는 국내에서도 발견되고 사망자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6일 국내 K대학병원 감염내과 의료진이 국제학술지 7월 호에 보고한 논문에 따르면 2007년 10월~2008년 7월 사이에 이 병원의 중환자실 입원 환자 57명을 조사한 결과 19명(33.3%)에게서 MRAB가 검출됐다. 이 가운데 4명이 이 균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됐다.

질병관리본부는 올해 말부터 수퍼박테리아의 대명사 격인 메티실린 내성 황색포도상구균(MRSA)과 반코마이신 내성 장구균(VRE) 등 5종의 수퍼박테리아를 법정감염병으로 지정해 관리하는 내용의 고시안을 준비하고 있다.

수퍼박테리아와의 전쟁은 점점 더 힘겨워질 전망이다. 획기적인 항생제를 개발한다 해도 이를 완전히 박멸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비관론이 나온다. 영국 BBC방송은 “인류에게 다시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 발명과 유사한 돌파구가 필요하다”며 “하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인류는 박테리아에 대해 다시 일시적인 우위를 점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수퍼박테리아를 죽이는 페인트가 개발됐다는 소식이다. 미국 과학 웹사이트 사이언스데일리는 지난 달 17일 “랜슬레어 응용과학연구소 연구원들이 자연에서 발견한 효소를 넣어 만든 페인트에 MRSA를 접촉시켰더니 20분 만에 100% 박멸됐다”며 “외과수술장비나 병원 벽 등에 코팅 처리함으로써 MRSA를 막는 데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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