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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의 기적, 우연이 아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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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그런데 막상 현장에 가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특사 외교’의 이면엔 이름 없는 수많은 산업전사의 땀과 눈물이 숨어 있었다. 세계 TV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소니는 동급이다. 자동차시장에서 도요타는 현대차보다 한두 체급 위지만 감히 넘보지 못할 상대는 아니다. 그러나 자원개발 전쟁에선 딴판이다.

자원개발 분야에서 세계 96위인 광물자원공사(KORES)의 자산은 14억 달러. 9위인 일본 미쓰비시상사(310억 달러)의 22분의 1이다. 세계 20대 자원개발 업체에 중국은 세 곳이나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한국 기업은 한 곳도 없다. 다윗과 골리앗 정도가 아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동막골 동네 축구팀과 맞붙은 형국이다.

도무지 상대가 안 될 것 같은 전쟁에서 그래도 한국이 용케 버텨낸 비결은 뭘까. KORES가 볼리비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건 2008년이다. ‘코로코로’라는 구리광산 개발사업을 놓고 공룡 중국 국영기업과 맞붙어 사업을 따냈다. 세 번이 아니라 ‘삼십고초려’ 끝에 이룬 성과였다. 볼리비아 정부가 한국을 다시 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리튬에서도 마찬가지다. KORES 김신종 사장은 ‘리튬’이란 단어를 양해각서(MOU)에 넣기까지 여섯 차례나 볼리비아로 날아갔다. KORES가 국내 4개 기업과 합작으로 볼리비아에 세운 현지법인 ‘코로코브레’에도 한국인 직원은 달랑 두 명뿐이다. 각각 KORES와 LS닛코에서 파견한 문영환 법인장과 지선명 이사다. 둘이서 코로코로 광산 개발과 리튬 쟁탈전을 한꺼번에 감당하다 보니 휴가는 사치다. 그렇다고 두둑한 오지(奧地) 근무수당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만큼 먹고 살게 된 것도 이런 분들이 흘린 땀과 눈물 덕이었는지 모른다. 옛 서독의 탄광에서 고국 대통령을 부여잡고 흘린 광부의 피눈물, 열사의 중동 사막에 뿌린 건설노동자의 땀, 숨이 턱턱 막히는 볼리비아 3600m 고지에 스며든 수많은 이의 한숨. 이런 게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보릿고개 악몽에서 헤매고 있었을는지 모른다.

지난주 볼리비아 현지 르포가 나가자 갖가지 댓글이 달렸다. 개중엔 ‘상왕(上王) 띄우기냐’는 비아냥도 있었다. 대통령 특사였던 이상득 의원을 힐난하는 말일 게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호들갑이란 얘기였다. 대통령 일가가 미운 것까진 어쩔 수 없다고 치자. 그러나 최소한 음지에서 땀과 눈물을 쏟고 있는 이들의 가슴에만은 못을 박지 말았으면 한다. 고맙다고 박수를 보내지는 못할망정.

<볼리비아에서> 정경민 뉴욕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