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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 문화

한겨울, 수선화에 취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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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얼마 전 강요배 화백이 제주도에서 수선 몇 뿌리를 보냈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그는 잊지 않고 수선을 챙겨준다. 올해는 알뿌리가 여간 튼실한 것이 아니다.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은 강 화백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새삼 황감해졌다. 당장 수반을 찾아 그 위에 괴석을 놓고 모래를 채운 다음 알뿌리를 심었다. 수선은 봄날 죽순 자라듯 쑥쑥 컸다. 하얀 꽃잎이 이내 벙근다. 창밖은 삭풍이 몰아치는데 나의 서재는 꽃향기가 떠다닌다. 지인들을 불러 수선의 자태를 선보이고 향기를 나눈다. 너도 나도 수선에 대해 한마디씩 보태는 바람에 한담이 끊일 새가 없다.

동양에서 수선은 '물 위를 걷는 선녀'로 불렸다. 그래서 '능파선자(凌波仙子)'라고 한다. 서양 신화에서는 물에 비친 제 얼굴에 반해 연못으로 뛰어든 나르시스의 꽃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물 위를 사뿐하게 걷는 선녀에 비해 그 미남은 아무래도 한 수 아래다. 그런가 하면 수선은 매화의 아우이자 연꽃의 형이라고도 했다. 매화나 연꽃은 선비들의 애완품으로 손가락에 꼽히는 존재다. 그들과 형제 또는 남매지간이니 수선의 반열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수선은 아취와 품격을 고루 지닌 꽃이다. 제주로 유배 간 추사 김정희는 수선을 편애했다. 그가 쓴 시 '수선화'에는 '매화 기품 높다 해도 뜰 앞을 벗어나지 못했는데/맑은 물에서 마침내 보았네, 해탈한 신선을'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런 수선인지라 아무 눈에나 들 리 만무하다. 추사는 수선 귀한 줄 모르는 백성들이 발로 밟거나 소와 말에게 먹이는 광경을 보고 "물(物)이 제자리를 얻지 못함이 이와 같다"며 장탄식을 했다.

한 노인이 지리산 아래 강가에 집을 지었다. 대나무로 둘러친 울타리 밑에는 사철 내내 꽃이 피었다. 등을 구부리고 온종일 꽃나무를 가꾸면서도 노인은 피곤한 줄 몰랐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꽃을 기르는 데 너무 몸을 부리고, 꽃의 아름다움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아닌가." 노인은 대답했다. "천지에 가득한 만물을 보니 오묘하게도 다 나름의 이치가 있더라. 그들의 덕을 본받아 나의 덕으로 삼는데 어찌 이로움이 많지 않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사물을 앞에 두고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이겠지." 꽃을 기르되 아름다움에만 빠지지 않는다. 그보다 꽃들이 가진 덕목을 살핀다. 추사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이 '물의 제자리'일 것이다. 노인은 꽃나무 기르는 법을 기록한 '양화소록'의 저자이자 조선 전기의 삼절(三絶)인 강희안이다.

그는 국화에서 은일한 품성을, 난초에서 그윽한 운치를, 창포에서 외로운 절개를 보았다.

그런가 하면 또 한 노인은 문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고 자칭하기를 '오류(五柳)선생'이라 했다. 벼슬살이는 내던진 지 오래. 거친 베옷을 입고 비바람도 못 가리는 집에 살면서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꽃을 따며 유유자적했다. 처자식과 둘러앉아 정담 나누는 일이 즐거웠고, 더 즐거운 일은 잘 익은 술을 따르는 것이었다. 텅 빈 방에는 거문고 하나. 달 밝은 밤 주흥이 도도하면 노인은 거문고를 어루만졌다. 그것은 낡아서 줄이 다 끊어지고 없는 무현금(無絃琴)이었다. 줄 없는 거문고를 어찌 연주하는지를 누가 묻자 그가 대꾸했다. "다만 아취를 즐길 뿐 거문고 줄을 수고롭게 하랴." 노인은 동진시대의 시인 도연명이다. 옛말에 '바둑은 두지 않는 것을 고수로 여기고 거문고는 타지 않는 것을 묘수로 여긴다'고 했다. 이쯤 되면 물의 자리를 떠난 경지가 아닐 수 없다.

제주 섬에 핀 것만큼 생기있지 않지만 수반 위의 수선을 보는 것만 해도 과분한 청복(淸福)이다. 수선이 나에게로 와서 제자리를 찾았는지 묻지 않으련다. 하물며 내게 '무현금'을 묻는 것은 턱도 없다. 나야 그저 수선 향기에 코를 박을 따름이다.

우찬규 학고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