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독일식 통일의 후유증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82호 31면

지난해 11월 북한 정권이 총력을 기울여 추진한 화폐개혁의 실패는 북한 사회가 이미 김정일 정권 차원에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시장은 다시 부활했고, 민심이반은 계속되고 있다. 북한 관련 인터넷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북한 주민들은 “화폐교환을 한다면서 강도질을 했기 때문에 이제 국가에 대한 믿음이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례적으로 3개월 만에 방중해 중국의 지지 확보를 과시한 것도 거꾸로 체제 불안을 방증한다.

북한 정권은 주민 동의가 아니라 통제와 억압을 통해 유지되기 때문에, 밑으로부터 증폭된 불만이 즉각적인 통치위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특히 연좌제와 정치범수용소로 상징되는 반체제 행위에 대한 가혹한 보복시스템은 초보적인 저항조차도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북한 체제를 오래 버티게 한 폭압통치와 수령절대주의의 지속 가능성이 심각하게 도전받는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중국에 나오는 노동당원들이 사석에서 정권 비판을 하고, 보안원들의 장마당 단속도 여의치 않을 정도다.

북한 체제의 변화는 흔히 혼란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인위적으로 가로막았던 물길이 제 길을 찾는 순리의 회복일 것이다. 북한 내부에서는 개혁·개방의 욕구가 분출될 것이며, 김정은이 권력을 잡는다 해도 이를 더 이상 외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김정은 시대에 한반도의 통일 논의가 활발해질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서는 ‘통일은 필수 아닌 선택’이라는 현실주의적 여론도 등장했지만 민족주의적 열정은 여전히 강력하다. 북한 주민들의 통일 요구 역시 강렬해질 전망이다.

하지만 통일 뒤 20년의 세월을 넘긴 독일의 경험을 보면 통일의 계획과 준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통일의 원칙과 방법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선결돼야 한다. 민족주의 감정을 통일의 에너지로 삼으면서도, 그 낭만성과 급진성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통일공학적 논의가 축적되어야 한다. 지난 10여 년간 한국의 대북정책 논의는 재앙을 야기할지 모르는 김정일 체제의 붕괴를 가급적 막아보자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김정일 정권 주도의 개혁·개방이 난망해지면서 이상주의적 접근으로 판명된 현상관리 노선은 결과적으로 현실도피적 한계를 노출했다.

통일의 몇 가지 원칙을 논하자면 맨 먼저 남북한 주민의 자주성, 특히 북한 주민의 자주성을 보호하는 것이 중시돼야 한다. 남한은 마땅히 북한의 생존과 경제재건을 도와야겠지만, 북한 주민의 자조자립의 정신이 훼손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둘째, 질서 있는 통일이 돼야 한다. 독일식의 조기통일은 단번에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비용과 갈등이 엄청나고 후유증도 심각하다. 동·서독에 비해 훨씬 더 격차가 벌어진 남·북한은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통합의 장점에 주목해야 한다.

셋째, 한반도와 동북아의 안전보장이 또 다른 포인트다. 전쟁이나 이에 준하는 무력분쟁을 반드시 막아야 하며, 남북한과 중국, 미국, 일본 등 주변 국가들 사이에 적대감이나 경계심이 증폭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통일세 논의를 제안한 것은 통일 준비의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던진 것으로 추측된다. 통일 비용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고, 그 규모가 막대해지면 추가적인 세금 형식이 불가피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의 준비가 병행돼야 한다. 선진국에 근접하는 경제적 풍요와 자유·인권을 누리는 우리의 바로 옆에서 빈곤과 정치적 억압에 시달려온 북한 주민에게 관심과 애정을 갖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홍진표 서울대 총학생회 사무국장, 범민련 간사 등을 역임하며 세 차례 투옥됐으나 1997년 이후 북한 민주화운동과 뉴라이트운동을 펼치며 보수 논객으로 활약 중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