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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기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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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 먼저 ‘미래의 기억들’이란 타이틀을 명시적으로 가능하게 한 것은 리움의 외벽에 설치된 로랑 그라소의 m·e·m·o·r·i·e·s·o·f·t·h·e·f·u·t·u·r·e 라는 19개의 활자다. 우리가 이미 익힌 철자법에 따르면 그것은 ‘미래의 기억들’이 되겠지만 정작 언제일지 모를 미래에 그 19개의 활자들이 또 어떤 조합으로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낼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단어들이 사라질 수도 있고 새 단어가 만들어져 그 활자들이 다른 뜻으로 각인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 보이는 것이 결코 전부가 아니며, 지금 여기서의 고정관념을 넘어서야 비로소 미래를 볼 수 있음을 그 타이틀은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

# 커다란 벽면에 향 분사기를 같은 간격으로 나열한 잭슨 홍의 작품 ‘땀샘’도 흥미로웠다. 땀이란 더워서 흘리는 것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노력과 분발의 상징이다. 그런데 우리는 점점 땀 흘리는 것의 미덕을 상실해 왔다. 땀 흘리기보다는 일확천금을 꿈꾸고, 땀의 가치를 평가하기보다는 점점 더 폄하하는 세태로 치닫고 있다. 그래서 미래의 어느 날엔가는 더 이상 땀이 나지 않는 인류로 진화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열심히 일하며 땀 흘렸던 시대의 희미한 기억을 재현하려고 향 분사기를 통해 대신 땀냄새라도 풍겨 보려는 해프닝이 일어날지 모른다. 하지만 미래의 그들은 땀냄새마저 망각했는지 정작 미술관에는 인공 허브향이 진동했다.

# 줄곧 비누를 작품 재료로 써온 신미경은 이번에도 비누 재료로 신안 앞바다에 침몰한 고대 유물선에서 건져 올렸을 법한 다양한 형태의 도자기들을 복제해 놓았다. 아마도 그녀는 비누가 물에 녹듯 미래엔 사라져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것들을 상징하는 작업을 한 것이리라. 비누거품처럼 사라지고 말 것들, 결코 영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경고를 담아서! 실제로 기획전 기간 동안 리움 내 두 곳의 화장실에는 비누로 만든 고대 그리스 조각상의 복제품이 놓여 손을 씻는 사람들에 의해 그것들이 마모돼 결국 사라지는 과정을 재현한다. 사라짐이 있어야 기억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이라도 시키려는 듯 말이다.

# 아프리카 스와힐리족 사람들은 누군가가 죽으면 ‘사사(sasa)’의 시간으로 들어갔다고 말한다. 그리고 미래의 어느 날 죽은 그를 기억하는 이들마저 모두 사라지고 나면 오래 전에 죽은 이는 이제 비로소 영원한 침묵과 망각의 세계인 ‘자마니(zamani)’의 시간으로 들어갔다고 얘기한다. 젊은 작가 ‘Sasa[44]’의 이름을 보고 혹 그런 뜻이 담겨 있는가 물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어머니가 44년생이라 그렇게 이름 붙인 것뿐이라고 말하곤 사라졌다. 그는 기획전 개막식에서 거대한 규모의 케이크를 선보였는데 그것을 관람객들이 먹어 치우는 행위를 통해 개막식 세리머니 자체도 미래의 기억들 중 하나로 만들었다. 미래의 언젠가는 그 케이크처럼 나도 너도 우리도 사라질 터이다. 그때 우리는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 이 화두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 내일이면 경술국치 100년이다. 우리는 100년 전의 그 일을 뼈아프게 기억한다. 하지만 정작 100년 후 미래에 오늘의 우리는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라는 물음에는 거의 무방비상태다. 미래의 기억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무서운 경고다. 미래는 우리가 오늘을 산 모습을 기어이 기억해 내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