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장규 칼럼

명성의 김철호가 그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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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답답하니까 별생각이 다 든다. 요즘 형편에 어떤 타입의 인물이 한국경제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할까. 지금도 많은 사람이 1980년대 초반의 김철호(명성그룹 회장)를 기억할 것이다. 나는 김철호 같은 인물의 등장이 가장 절실하지 않나 싶다. 당시 그는 콘도사업을 통해 국내 레저산업에 신경지를 개척했으나 청와대에 괘씸죄로 걸려 욱일승천하던 기업을 다 날리고 감옥살이까지 해야 했다.

그는 기발한 사업가였다. 여러 평가가 있으나 어쨌든 한국레저산업의 선구자였음엔 틀림없다. 무명의 촌놈 기업인이 아무도 생각 못했던'콘도'사업으로 전국 땅값을 뒤흔들었고, 이른바 리조트 붐을 몰고 오면서 하루아침에 유명해졌다. 온갖 루머가 난무했다. 청와대 배후설을 비롯해 통일교 자금설, 또는 전대미문의 사기꾼이라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대통령 특명으로 정부가 단속에 나섰으나 '콘도'라는 신개념 사업을 규제할 법적 근거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국세청을 동원해서 사채를 썼다는 죄목으로 콩밥을 먹였다. 사업하는 사람이 비싼 이자 물고 사채 끌어 쓴 게 무슨 죄가 된다고. 결국 김철호는 경제범이 아니라 정치범으로 감옥에 갔고, 명성그룹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콘도시설과 골프장 등의 주요 재산들은 후일 한화그룹한테 헐값에 넘겨져 지금의 알토란이 됐다.

만약 김철호의 명성그룹이 여태까지 무사히 사업을 해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모르긴 해도 그가 한국의 레저산업 수준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시켰으리라 확신한다. 당시 그의 집무실에는 갖가지 아이디어를 형상화한 미니어처가 가득했다. 골프장.스키장은 기본이고 갖가지 테마 파크, 수상 호텔 건설 청사진 등등. 해외자본을 끌어오는 것은 물론이고 듣도 보도 못한 세계적인 디자이너.설계가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지내놓고 보면 그는 너무 앞서 나갔고 사업구상 역시 그때 실정으론 너무 벅찬 것이었다. 지금쯤 그런 사업을 벌이고 나섰더라면 딱 들어맞았을 것을 20여년 전에 시도했다가 낭패를 봤던 것이다. 그 이후로 여러 대기업 2세 오너들이 레저산업에 뛰어들었으나 김철호 근처에도 못 갔다. 그 결과 경제규모 세계 11위 나라에 그럴듯한 레저회사가 단 한개도 없는 실정이 돼버린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작년 한 해 해외여행으로 쓴 돈은 무려 100억달러에 육박했다 한다. 77년에 수출목표 100억달러를 달성했는데 지금은 해외여행으로 그만큼을 쓰고 있는 셈이다. 오죽하면 경제부총리가 나서서 설 연휴 때 제발 국내에서 돈 써달라고 볼멘소리를 했겠는가. 부총리 자신도 하도 답답해서 그저 해본 말이었을 게다. 이런 추세라면 해외여행 경비는 계속 늘어나게 돼있다. 폭증하는 레저 수요를 감당할 길이 없다. 그나마 명산이 많아 등산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게 다행이다. 최근 들어서야 규제를 풀고 정책전환을 모색하고 있으나 늦어도 한참 늦었다.

위화감 타령 그만하고 이제부터라도 정부.기업.소비자 모두가 레저산업을 필수불가결의 미래산업으로 받들어 모셔야 한다. IT산업이나 생명공학에만 영웅이 필요한 게 아니다. 즐기며 노는 쪽에서도 위대한 영웅기업가가 나와야 한다. 국내 레저산업이 잘되면 나가는 한국사람 붙잡는 것뿐 아니라 외국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

로드맵이 돈 벌어 주나. 더 이상의 토론도 필요치 않다. "레저산업이 새 살길"이라는 절실한 인식과 실천이 선결요건이다. 그래야 갖가지 규제도 확 풀 수 있고 레저영웅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하여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해안 일대는 중국사람들이, 남해안 일대는 일본사람들이 북적대도록 해야 한다. 중국어.일본어 간판들이 거리거리에 즐비하게 나붙어야 한다. 중국부자.일본부자들이 떼로 몰려와 돈 안 쓰곤 못 배기도록 모든 장삿속을 총동원하자. 세계 최고의 마작판도 벌이고, 국제적인 매력의 휴양도시도 만들어내야 한다. 해외여행 억제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급감하는 제조업 일자리를 보완할 수 있는 대체 일자리들이 뭉텅이로 걸려 있는 국가적 과제다. 새로운 먹거리 원천이기 때문이다. 제2, 제3의 김철호 같은 레저 영웅의 출현이 절실한 때다.

이장규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대표이사